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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제시 대우조선해양 남문.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자 노동자들이 하나 둘 공장 문을 나선다. 안전모와 버프, 낡은 안전화, 기름때와 흙투성이 작업복, 검게 그을린 얼굴…. 고된 노동을 마친 이들이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온종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철판을 용접하고, 허공에 올라 파이프와 철판을 연결하고, 그라인더로 쇳덩어리를 갈고, 모래로 철판 표면을 매끄럽게 만들고, 크레인으로 철판을 들어 나르는 조선소의 거친 노동이 작업복과 얼굴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옥포만에서 이들의 두 손과 땀방울로 상선 50척, 잠수함 2척, 해양플랜트 10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똑같은 안전화와 작업복과 안전모. 가슴에 부서 이름이 찍혀 있으면 직영, 하청업체 이름이 쓰여 있으면 하청이다. 하청업체 본공인지 물량팀인지는 알 길이 없다. 배를 만드는 노동자의 70~80%가 비정규직 사내하청인 세계 유일의 나라, 대한민국 하청조선소, 내년에도 이들은 이 공장에 남아 있을까?

대우조선해양 퇴근 풍경

 거제 하청노동자 대행진이 오는 10월 29일 개최될 예정이다.
거제 하청노동자 대행진이 오는 10월 29일 개최될 예정이다. ⓒ 박점규

지난 15년 조선 산업은 호황이었다. 선박과 해양플랜트 수주가 폭발했다.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가 발행하는 <조선자료집>에 따르면 2000년 7만9776명이던 13개 조선소 노동자는 2014년 20만4996명으로 늘었다. 한 때 거제에서는 지나가던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간다는 얘기가 돌아다녔다.

그런데 기업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정규직 대신 하청을 썼다. 하청업체 본공, 물량팀, 돌관팀이라는 다단계 하청을 값싸게 부려먹으며 저가 출혈경쟁을 일삼았다. 기술은 축적되지 않았고, 품질은 떨어졌다. 2014년부터 유가하락으로 해양플랜트 발주가 급감했다. 조선강국의 아성은 하루아침에 흔들렸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대우조선해양에는 4만9000명이 일했다. 정규직이 1만3000명, 사내하청이 3만6000명이었다. 지금은 4만2700명으로 줄었다. 6천 명 넘는 하청노동자가 사라졌다. 현대중공업에서도 1년 사이 849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정규직도 사무직을 중심으로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에서 5000명 이상의 감원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3만 명 이상의 조선소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문제는 앞으로다. 조선소 구조조정이라는 초특급 폭풍이 몰아치는 뱃머리, 갑판 끝에 하청노동자들이 매달려있다. 해양플랜트가 선주사에 인도될 때마다 1500명 안팎의 하청노동자가 잘려나간다.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는 내년까지 5만6000명에서 6만3000명이 직장을 잃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내년까지 조선소에서 6만 명이 잘린다

"제 주변에 조선소 경력 20년씩, 30년씩 된 사람들, 고향 가서 낚시 배 사서 통발하고 있고, 감자탕집 하고 있어요. 앞으로 조선 경기가 좋아진다고 해도 사람들이 다 떠나고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가진 기술과 숙련과 경험을 어디서 구할 겁니까? 사람들을 수입해 올 거냐고요? 하청노동자들 다 해고하면 우리나라 조선의 미래가 없습니다."

거제에서 30년 조선소 노동자로 일한 하청노동자가 말한다. 허허벌판 황무지에서 세계 1위 조선 산업을 일군 건 바로 조선소 직영과 하청 노동자들의 두 손이었다. 10년 이상의 오랜 숙련과 뛰어난 기술력으로 유럽의 조선기술을 따라잡았다.

그런데 정부와 기업은 조선 산업 위기를 이유로 하청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고 있다. 청춘을 바쳐 초대형 선박과 석유시추선을 만들어낸 하청노동자들의 숙련과 기술이 사라지고 있다. 1차 하청(본공), 물량팀, 돌관팀에 이르는 다단계 하청구조는 조선소 노동자들의 죽음이 소리소문없이 이뤄지게 하고 있다.

해고만이 아니다. 임금삭감과 체불이 사상 최악의 상태다. 대기업 조선소가 사내하청업체의 기성금을 깎거나 체불하면 하청노동자들은 다시 1차, 2차, 3차로 연결되어 임금이 깎이고 체불되고 일자리를 잃는다. 하청노동자의 월급은 반토막이 났다.

그러나 정부는 조선소 대량해고를 수수방관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자료에 따르면 6월 8일 조선업 고용지원대책 발표 이후부터 지금까지 피보험자격 확인 청구를 한 조선소 노동자는 38명에 불과했다. 이 중 물량팀 노동자는 18명이었다. 1만4000명의 조선소 물량팀 노동자들 중 고작 18명이 피보험자격 확인 청구를 한 것이다.

조선업 고용보험 피보험자 수는 16만4200명으로 올해 1월보다 2만3300명 줄어들었다. 또 국선 노무사를 활용해 체당금을 신청한 노동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부의 조선업 지원대책은 하청노동자들에게 아무 쓸모없는 대책이라는 게 확인된 것이다.

뱃고동 소리보다 허망하게 사라지는 사람들

조선소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보다 훨씬 많지만, 노조에 가입한 노동자는 극소수다.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사내하청지회, 전남서남지역지회가 울산과 목포에서 활동하고 있고, 최근 거제고성통영조선하청지회준비위원회가 꾸려져 거제에서 조선하청노조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최근 세 주체가 모여 공동투쟁기구를 결성하고, 조선소 사내하청 대량해고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거제는 한국 최대의 조선 도시이자 하청도시다. 거제에는 대우조선해양과 삼성중공업에서만 5만5천 명의 하청노동자가 일하고 있고, 인근 고성, 통영의 하청노동자들을 합하면 10만에 가까운 조선하청노동자가 배를 만든다.

오랜 시간 침묵하고 있던 거제의 하청노동자들이 일어서 싸우겠다고 나섰다.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준) 노동자들이 10월 29일 거제에서 '하청노동자 대행진'을 하겠다며 시민사회에 연대를 호소했다. 20년 굴종의 세월을 넘어 하청노동자 스스로 목소리를 내겠다고 나선 것이다.

지난해 40미터 타워크레인에 오른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강병재씨는 정규직노조와 시민사회의 연대, 희망버스에 힘입어 고공농성 165일 만에 무사히 땅으로 내려왔고, 지난 9월 약속대로 정든 일터로 복직했다. 한국사회에서 희망버스는 힘없는 노동자들에게 따스한 손길을 건네는 작은 힘이다.

싸우겠다고 나선 조선소 하청노동자들

 거제 조선소 하청노동자 대행진 선포 기자회견
거제 조선소 하청노동자 대행진 선포 기자회견 ⓒ 박점규

조선소의 이야기를 들은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머리를 맞댔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소리 없는 죽음'을 사회에 알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가정이 파괴되고, 지역경제마저 무너뜨리는 조선소 대량해고를 막아내기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기로 했다. 61개 단체가 '조선하청대책위'를 꾸렸다.

조선소 노동자들의 고용을 지키는 일이 곧 조선 산업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라는 의미로 10월 29일 거제에서 (가칭)'고용안정호'라는 이름의 모형배를 제작하기로 했다. 조선소에서 일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고용안정을 바라는 시민들의 마음을 모아서 높이 3미터, 길이 7미터의 대형배를 만들기로 했다.

용산참사, 세월호 등 현장에서 예술운동을 이끌었던 파견미술팀 예술가들이 함께 하기로 했다. 3000-3000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시민들의 이름은 '고용안정호'에 새겨진다. 10월 29일 거제에 모인 노동자 시민들이 함께 배를 완성하고, 고용안정호를 끌고 행진을 진행할 계획이다.

10월 29일 거제에서 열리는 조선소 하청노동자 대행진에는 울산과 목포의 하청노동자들도 참여한다. 사상 처음으로 전국의 조선소 하청노동자가 모이는 날이다. 서울에서는 10월 29일 오전 9시 버스를 타고 거제로 내려가 조선소 하청노동자 대행진에 참여한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응원하고, 이들이 용기를 얻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마음을 모으려고 한다.

이날 거제는 숨죽여있던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고, 꾹꾹 눌러왔던 분노가 폭발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10.29 거제 희망버스가 크레인보다 더 위태롭게 매달려있고, 굴뚝보다 더 절박하게 절규하고 있는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을 향한 아름다운 동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 박점규

ⓒ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3000-3000' 프로젝트를 위한 하청노동자 지지 선언" 페이지로 이동하기)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입니다.



#비정규직#조선소#거제#구조조정#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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