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 37주년이 되는 날이다. 해마다 이날만 되면 생각나는 게 하나 있다. 육군참모총장, 주미대사, 외무장관, 국무총리, 국회의장까지 지낸 고 정일권 씨가 10ㆍ26사건 직전에 꾸었다는 꿈 이야기다. 그가 77세로 별세하고 2년 뒤인 1996년 출판된 '정일권 회고록'에 이렇게 적혀있다.
"그 비보가 있기 1주일 전 나는 아주 불길한 꿈을 꾸었다. 박 대통령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각하! 이게 웬일입니까?' 나는 깜짝 놀라 얼떨결에 그를 끌어안았다. '정형! 나 좀 살려줘.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던 것 같아….' 박 대통령의 가슴팍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욕심이라니요? 무슨 욕심 말입니까?' '나 딴엔 좀 더 열심히 해보려고 했던 것인데 대통령을 너무 오래 했던 것 같아요' '정신 차리세요. 우선 병원에 가야겠습니다.' '가망 없어요. 나로 인해 수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는데, 나라고 해서 무사할 것 같지 않아요….' 박 대통령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가쁜 숨만 간신히 내쉬고 있었다. '각하! 각하!'나는 이렇게 외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이 때 나는 국회의장 직책을 마치고 일개 평범한 국회의원 신분이었다."정일권과 박정희는 나이가 동갑이고 일본군이 만든 만주국 사관학교 선후배 사이었다. 박정희의 5·16쿠데타 당시 정일권은 4·19 시민혁명 이후 수립된 허정 과도정부의 주미대사로 나가 있었다. 정일권 대사 재임 중 군사혁명정부 지도자가 된 박정희 소장이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워싱턴으로 찾아가 만났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라벗 케네디 법무장관(케네디 대통령 동생)을 찾아가 만날 때는 정 대사가 안내했다.
1963년 4월 주미 대사직에서 물러난 정일권은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 유학하고 있다가 그해 10월 박정희가 윤보선을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자 제3공화국 초대 외무장관에 임명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 대해 정일권 본인과 김종필의 말이 상당히 다르다.
김종필은 정일권이 감투를 간곡히 부탁하기에 자기가 박대통령에게 부탁해서 외무장관이 되었다고 회고했으나, 정일권은 제3공화국 출범을 불과 며칠 앞둔 시점에 박 대통령이 서울서 영국으로 직접 전화를 해서 외무장관 임명을 통보했다고 회고록에서 말했다. 그러나 2015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회고록 '소이부답'에서 김종필은 이렇게 말했다. (이 회고록은 김종필이 한 말을 신문기자가 녹음하여 대필한 것이다.)
정일권의 화려한 이력서에 공간이 있다. 63년 4월 주미대사를 그만두고 12월 외무부 장관이 될 때까지 8개월 동안이다. 그해 여름이었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 적을 두고 공부하던 정씨가 파리에 머물던 나를 찾아왔다. 나는 공화당 창당과 민정 이양 문제를 둘러싸고 혁명주체의 내부 갈등이 폭발 지경에 이르러 이른바 '자의 반 타의 반' 1차 외유(63년 2월 25일~10월 23일) 중에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래, 앞으로 무엇을 하시렵니까'하고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 고국에서 일 좀 하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님 한테 말씀 좀 드려주세요. 해외에 있는 것도 이젠 질렸어요'라고 사정을 했다.아직 혁명정부 시절이어서 박정희 의장은 내 건의를 잘 받아줄 때였다. 정 의장의 경력을 고려해 내가 '외무부 장관을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아이고, 장관 아니라도 뭐든지 시켜만 주면 감지덕지하지요'라고 답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박 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런던의 정일권 장군이 저한테 와서 뭐든지 할 테니까 일 좀 시켜달라고 합니다.' '그래? 뭐해 줄까?' '외무장관을 시키면 어떻겠습니까?' '어 그래. 내가 생각해 볼게.' 박 의장은 하루 이틀 있다가 정씨를 들여보내라고 연락을 줬다.그러나 정일권 회고록에는 김종필과 만난 얘기가 없다. 정일권 회고록에는 이렇게 써있다.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대학에서) 언제까지나 학구생활에 몰두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부질없는 꿈에 지나지 않았다. 깊은 밤 자정 가까운 시각에 걸려온 전화로 런던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1963년 12월 8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뜻밖에도 박정희 의장의 전화였다. (이하 일부 생략) 공부는 이제 그만하고 돌아와서 도와주기 바란다는 전화였다. 최두선 내각이 12월12일 출범하니 "일 하나를 꼭 맡아주셔야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내 확답을 바라는 것이었다. 12일이면 이틀밖에 여유가 없다. 짐을 꾸릴 여유도 없이 런던을 떠나야 했다. 유서깊은 상아탑을 떠나는 아쉬움은 컸으나 내가 필요하다는 소명을 기꺼이 따르기로 했다.김종필은 정일권이 1963년 여름에 영국 유학이 지겨우니 감투하나 달라고 사정을 했다하고 정일권은 유학생활이 좋아 더 있고 싶었으나 새 내각 출범 4일 전에 박정희 대통령 당선인이 전화를 직접 걸어 외무장관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해서 아쉽지만, 영국을 떠났다고 했다.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정일권이 육군참모총장일 때 김종필은 육군 중위에 불과했다. 그런 김종필이 처삼촌인 박정희 소장과 함께 5·16쿠데타를 주도하여 정권을 잡아 자기보다 높아졌으니 정일권은 김종필 덕분에 외무장관이 된 게 설사 사실이라 해도 회고록에 쓰기 싫었을 것이다.
회고록, 특히 정치인의 회고록을 100% 다 믿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을 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회고록 같은 1차 사료는 역사가들에겐 매우 중요한 자료다. 하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다 믿어선 안 된다. 사도세자의 경우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사도세자는 당파 싸움의 희생자이며 그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부왕 영조는 잔인한 임금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최근엔 사도세자가 정신질환이 있어 사람을 수십 명이나 죽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정일권에 대해 이런 말도 했다.
정일권씨는 인생의 위기가 닥칠 만한 지점에서 묘하게 빠져나가 자리까지 얻어 가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곤 했다. 1970년 3월 17일 밤 11시 서울 절두산 앞 강변도로에 서 있던 코티나 차량에서 총성이 울리더니 25세 여인이 숨진 채 발견됐다. 여인은 고급 요정 선운각 출신 호스티스 정인숙. 정인숙은 운전기사 역할을 하던 오빠 정종욱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발표됐다.오빠가 동생을 죽였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건 수사를 경찰이나 검찰 형사부가 아니라 간첩ㆍ정치 사건을 다루는 서울지검 공안부(부장검사 최대현)에서 담당한 게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시중엔 정인숙의 세 살배기 아들 성일이가 최고위 권력층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퍼졌다.김종필은 정인숙이 정일권의 여자라고 주장한다. 그는 정일권이 청와대로 달려가 박 대통령에게 이실직고하고 "각하, 살려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정인숙은 그녀의 오빠가 살해한 것으로 법정에서 결론났고 오빠는 19년 옥살이 후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자기가 동생을 죽이지 않았고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죽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정인숙이 낳은 아들이라는 미국 거주 청년이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으나 정씨가 사망하는 바람에 위자료 100만 달러를 받고 소를 취하했다고 한국언론이 보도한 바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조화유 기자는 미국거주 작가이며 영어교재 저슬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