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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만이다. 지난 3월 12일, 도봉산역에 있는 서울창포원에서 시작해 완주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11월 12일, 서울창포원에 다시 방문하기까지 꼭 8개월이 걸렸다. 한국백혈병환우회에서 주최한 서.둘.토는 8코스의 서울 둘레길을 매월 두 번, 토요일에 걷는 프로젝트다.

참가자들은 백혈병을 앓았던 경험이 있거나 현재 백혈병 투병 중인 환자와 그 가족들이다. 함께 걸으면서 투병 생활에 대해 궁금한 점을 나누고 어려움도 함께 나누자는 취지다. 마지막 날인 11월 12일, 서울 둘레길의 8코스를 14명이 함께 걸었다. 이들은 지난 8개월간 157km의 여정을 함께 해 왔다.

 한국백혈병환우회에서 주최한 '서.둘.토' 프로젝트에서는 서울 둘레길 걷기 뿐만 아니라 길을 걸으며 만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조혈모세포 기증 홍보 활동도 진행했다.
 한국백혈병환우회에서 주최한 '서.둘.토' 프로젝트에서는 서울 둘레길 걷기 뿐만 아니라 길을 걸으며 만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조혈모세포 기증 홍보 활동도 진행했다.
ⓒ 한국백혈병환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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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 투병 전과 후, 달라진 것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여름에 산행하는 게 가장 힘들죠. 땀은 비 오듯 하는데 모기도 많고... 쉴새없이 물을 마셔줘야 하고요. 화장실 가는 게 걱정돼서 물마시기를 자칫 소홀히 했다가는 금방 탈이 나죠. 올 여름에 정말 더웠잖아요. 그나마 산이니까 이 정도려니 하면서 도 닦는 마음으로 걸었던 것 같아요."

서울 둘레길이 비교적 완만한 코스임에도 여름 산행은 버겁다. 날씨 탓이다. 계절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환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 7월 2일에 진행한 서.둘.토에서는 오후 4시부터 6코스인 안양천코스를 걸었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마친 지 8년이 된 이미진씨는 날씨 때문에 걱정했는데 뜻밖에도 멋진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며 소감을 밝혔다.

"그날은 정말 더웠어요. 이렇게 가면 이번 코스는 완주를 못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참 걷고 있는 와중에 해가 지는데 석양이 그럴듯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있으려니까 '괜찮다', '계속 가도 괜찮아'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8km에 비교적 걷기 쉬운 코스였지만 날씨 때문에 겁을 냈거든요. 자연 앞에서 왠지 숙연해지는 느낌, 그런 걸 느꼈던 것 같아요. 건강한 사람들에게 둘레길 코스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투병 이후에 이런 걸 시도한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니까요."

 '서울 둘레길 토요일 걷기'는 백혈병 투병 중이거나 완치된 환자들, 가족들,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서울 둘레길을 걸으며 건강과 자신감을 찾기 위해 진행한 프로젝트다. 사진은 7월 2일에 진행한 여덟번째 서.둘.토. 프로젝트.
 '서울 둘레길 토요일 걷기'는 백혈병 투병 중이거나 완치된 환자들, 가족들, 자원봉사자들이 함께 서울 둘레길을 걸으며 건강과 자신감을 찾기 위해 진행한 프로젝트다. 사진은 7월 2일에 진행한 여덟번째 서.둘.토. 프로젝트.
ⓒ 한국백혈병환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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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으로부터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은 후 17년이 됐다는 조원구씨는 사정이 좀 다르다. 서.둘.토 프로젝트의 길잡이를 할 정도로 산행에 익숙하다. 그는 이식 후 몸에 좋다는 음식은 다 구해다 먹은 탓에 1년 만에 몸무게가 20kg이 늘었다. '백혈병이 문제가 아니라 비만으로 성인병에 걸리겠다'는 자각에 다이어트를 결심하고 먹는 것을 조절하는 동시에 마라톤을 시작했다. 너무 열심히 하는 성격도 탈인지 마라톤으로 10kg 정도 감량한 후에 관절에 무리가 와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산행이었다.

"백혈병에 걸리고 조혈모세포 이식하고 나서 생각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 성격은 그대로에요. 너무 열심히 하다 탈이 나는 거죠. 암 환자들이 투병하면서 제일 많이 하는 게 산행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또 지나치면 안 돼요. 저처럼 무리하면 관절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몸이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줘야 해요. 우리 몸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거든요."

걸으면서 각자의 투병 경험을 나누는 것은 서.둘.토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백혈병을 앓았거나 가족의 투병을 지켜본 가족들이라 몇 마디 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아픔과 어려움에 쉬이 공감할 수 있다. 거창한 조언이나 도움이 아니더라도 투병 중인 환자들에게는 '희망의 증거'가 되기도 하는 법이다.

 한국백혈병환우회의 회원들과 가족들, 자원봉사자들은 지난 3월 12일부터 8개월간 총 157km의 8코스를 함께 걸었다.
 한국백혈병환우회의 회원들과 가족들, 자원봉사자들은 지난 3월 12일부터 8개월간 총 157km의 8코스를 함께 걸었다.
ⓒ 한국백혈병환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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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이후에 가장 많이 변한 게 있다면 마음가짐인 것 같아요. 특히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가장 커요. 예전에는 그걸 알았어도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표현하는 데 소홀했거든요. 그런데 앓고 나니까 표현 안 하고는 못 배기겠더라고요. 함께 하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 건강할 때는 잘 몰랐으니까요. 아내와 함께 동네 뒷산에라도 오르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마음 표현하는 데 그렇게 거창한 게 필요한 것 같지는 않아요."

조혈모세포 이식 후 9년이 되었다는 이충호씨는 자기 주변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다. 따로 시간을 내 백혈병 환우를 위한 '무균차량 클린카' 운전봉사를 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해 주기도 한다. 서.둘.토 프로젝트를 하는 동안에도 처음 나온 환자나 가족들에게 살갑게 이야기를 건네고 농담을 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함께 걸으며 소통하는 프로젝트는 내년에도 계속~

서.둘.토를 주최한 한국백혈병환우회의 이은영 사무처장 역시 조원구씨, 이충호씨와 함께 8코스를 완주한 장본인이다. 이은영 사무처장도 백혈병을 앓았고 12년 전에 조혈모세포 이식술을 받았다.

"일주일 동안 일을 하고 나면 토요일은 쉬고 싶다는 생각이 크죠. 피곤한 상태일 때도 있었고 체력도 약했거든요. 그동안 좀 힘들게 걸었는데 7코스부터는 좀 속도가 붙기 시작했어요. 그날 저희 백혈병환우회의 재능기부 서포터즈 '반딧불이' 대학생들이 같이 참가를 해서 걸었는데 간호학과 학생들 몇 명이 있었어요. 같이 걷는 환자들 입장에 그 친구들과 함께 해서 동기부여가 컸던 것 같아요. 그날 같이 조혈모세포기증 홍보 캠페인도 하면서 즐겁게 걸었어요."

길을 걸으면 아이디어가 샘솟는 모양이다. 이은영 사무처장은 벌써 내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서울 둘레길은 환자들 입장에서 좀 어려운 코스도 있어요. 암 치료 후 건강을 회복해야 하는 환자들 입장에서는 감염 우려 없이 꾸준하게 운동할 여건이 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내년에는 '환자를 위한 둘레길'을 한 번 진행해 볼까 생각 중이에요. 전문가와 함께 답사를 하면서 코스를 개발하고 같이 걸어보면 어떨까 생각해요."

함께 걸으며 소통하는 것. 그것은 꼭 환자에게만 중요한 이슈는 아닐 것이다. 투병의 아픔을 겪은 환자나 가까운 사람들의 투병을 지켜보아야 하는 가족들, 그런 과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에게도 말이다. 내년 프로젝트를 함께 할 걸음에 응원을 보낸다.

 '서울 둘레길 토요일 걷기' 프로젝트에 변화가 생길 전망이다. 암 환자들이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할 수 있는 코스를 개발할 계획이다. 사진은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2016년 서.둘.토. 참가자들.
 '서울 둘레길 토요일 걷기' 프로젝트에 변화가 생길 전망이다. 암 환자들이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할 수 있는 코스를 개발할 계획이다. 사진은 익살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2016년 서.둘.토. 참가자들.
ⓒ 한국백혈병환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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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백혈병환우회#서울 둘레길 토요일 걷기#서둘토#서울 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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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노동자. 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작업을 해왔으나 암 진단을 받은 후 2022년 <아프지만, 살아야겠어>, 2023년 <나의 낯선 친구들>(공저)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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