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김관태(67)씨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사생대회 등에 나가 상을 휩쓸기도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붓을 놓아야 했다. "환쟁이를 시킬 수 없다"라는 부모의 결심 때문이었다. 결국 공고를 졸업한 뒤 기아자동차에 들어가 '산업역군'이 됐다. 그곳에서 3년간 노조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꿈은 쉽게 버릴 수 없었다. 서울과학기술대 회화과에서 뒤늦게 미술공부를 시작했고, 동방대학원에서 옻칠 조형학 박사과정도 수료했다. 1974년 초상화 그룹전을 시작으로 화인회 그룹전, 현대미술 오스트리아비엔나전, 한국.유고슬라비아 작가 미술교환전, 한.중.일.아르헨티나 국제교류전, 국제 아트페어 등에 참가했다. 한국디지털미술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는 화이부동의 정신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작업실이 전북 군산의 국가산업단지에 위치한 자동차 부품공장에 있다는 점이다. 자동차 부품공장은 그가 기아자동차를 퇴직한 뒤 세운 일터인데 그곳에서 다섯 살 손녀 김세민(5)양과 함께 그림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는 유치원에 다니는 손녀를 "금쪽같은 세미니"라고 부르고, 손녀는 그를 "금쪽 같은 하부지"라고 부른다.
자동차 부품공장 작업실의 '단짝'인 할아버지와 손녀가 지난 14일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 '미술세계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다. '김관태전'이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김관태-김세민 2인전'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할아버지는 '화이부동' 연작 10점 등 총 35점을, 손녀는 '두더지', '거미집' 등 15점을 대중들 앞에 선보였다.
이번 전시회의 주제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그는 30여년간 화이부동을 철학적인 주제로 삼아 작업해오고 있다. 1980년-1990년대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노사갈등 등 사회적 갈등을 온몸으로 겪어낸 그가 '화이부동'을 오랜 화두로 붙잡은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대목이다.
'화이부동'은 공자가 <논어>의 자로편에서 "군자 화이부동 소인 동이불화"라고 말한 데서 나온 고사성어다. 흔히 '차이를 인정하면서 화목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신영복 교수는 화이부동을 "공존과 평화의 원리"라고 해석한 바 있다.
백지홍 월간 <미술세계> 편집장은 "과거 극도로 열악했던 노동조선을 개선하기 위해 최선봉에서 맞서 싸웠던 그에게 서로 다른 것들의 조화는 단순히 책에서 보고 배운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삶과 직결된 문제였다"라며 "서로를 배제해서는 스스로도 존재할 수 없는 동시에 같아질 수도, 같아져서도 안되는 것들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라고 평했다.
특히 그가 '화이부동'이나 '가족'이라고 이름붙인 연작들은 '끈'을 이용해 작업한 것들이다. 텅 빈 캔버스에 끈을 던져놓고 그 끈이 만드는 자연스러운 모양에 맞추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끈은 인연이나 관계망, 연결망을 상징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화이부동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차이, 다름을 인정하면서 화합이나 통합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로도 들린다.
"나는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그는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하지 말자"라며 "그래서 화이부동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하모니는 같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하늘과 땅, 음과 양, 흑과 백 등이 서로 다르지만 상호보완적인 존재"라고 본다. 그는 작가노트에 이렇게도 썼다.
"자극이 없으면 지루하다. 양극단이 없으면 지루하다. 양극단이 있어야 중도가 있다. 양극단 속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용이다. 그래서 화이부동을 좋아한다."그는 자동차 부품공장 작업실에서 손녀와 함께 화가의 꿈을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어쩌면 '화가의 꿈이 손녀에게로 이어진다'가 더 어울리는 표현일지 모른다. 손녀가 하루 8시간 캔버스 앞에 앉아 있다고 하니 더욱 기대된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좋다"라고 자평했던 그는 "가장 절망적인 말이 '완료했다', '다 했다', '다 끝냈다'이다"라며 "그래서 나는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물음표를 붙였다, 느낌표를 붙였다 하는 반복작업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