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드라마 <화랑> 같은 신라시대 사극에는 박씨·석씨·김씨가 자주 등장한다. <화랑>에도 박영실(김창완 분), 김지뒤(진흥왕, 박형식 분), 석현제(김종구 분) 같은 인명이 등장한다. 이것은 신라 왕실에 3대 성씨가 있었다는 우리의 상식에 부합한다.
역성혁명이란 말이 있다. 왕조국가에서는 왕실의 성씨가 바뀌는 게 혁명이었다. 조선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성계는 1392년에 고려 공민왕의 미망인인 안정비(정비 안씨)의 교서를 받고 감록국사(임시 임금)에 임명된 뒤 정식으로 주상이 됐다. 이듬해인 1393년, 국호가 조선으로 바뀌기 전까지 이성계는 고려 법률에 따른 고려 주상이었다.
그래서 형식적 관점에서 보면 조선은 1393년에 세워진 나라다. 하지만, 우리는 조선이 1392년에 세워졌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1392년에 임금의 성씨가 왕씨에서 이씨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역성혁명 관념에 따라, 우리는 임금의 성씨가 바뀌면 왕조도 바뀐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상식이다. 그리고 이 상식에는 아무런 문제점도 없다.
그런데 이런 상식이 신라왕조한테는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신라 왕실에 3대 성씨가 있었으며 이들이 번갈아 왕위를 차지했다고 믿는다. 이것은 '하나의 왕조는 하나의 성씨로 구성되며, 왕실의 성씨가 바뀌면 왕조가 교체된다'는 역사학의 상식에 어긋난다. 그런데도 아무런 의심 없이 우리는 신라 왕실에 대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화랑> 같은 드라마에도 박·석·김 3대 왕족이 자연스레 등장하는 것이다.
만약 3대 성씨가 신라 왕위를 번갈아 차지했다면, 이것은 신라에서 역성혁명이 수시로 일어났다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고려가 조선으로 교체될 때의 정치적 혼란과 유사한 상황이 신라 역사에서도 수시로 발생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어디에도 그런 역성혁명이 신라에서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석탈해와 김알지의 직계 혈통이 번갈아 왕위 차지이해할 수 없는 일은 한둘이 아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서기 184년에 박혁거세의 직계 혈통인 제8대 아달라왕이 사망하자, 석탈해의 직계 혈통인 벌휴왕이 등극했다. 그 후로는 석탈해와 김알지의 직계 혈통이 번갈아 왕위를 차지했다.
그러는 사이에 72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박혁거세 혈통의 왕이 728년간 나오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상식에 따르면, 이쯤 되면 박씨 왕실이 끊어졌어야 한다. 그런데 912년, 박혁거세 직계 혈통인 신덕왕이 자연스럽게 왕이 됐다.
왕실이 왕권을 빼앗긴 지 몇 십 년이 흐르면, 그 왕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런데 박혁거세 혈통은 무려 728년 만에 왕권을 회복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석씨·김씨가 신라 역사에 등장하게 된 배경에서부터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 가면, 이런 일들이 어렵지 않게 우리 머릿속에서 풀리게 될 것이다.
신라는 매우 약한 나라였다. 주변의 고구려·백제·가야·왜국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내부에 유입된 이주민 세력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런 강력한 이주민 집단 중에 대표적인 것이 석탈해 집단과 김알지 집단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신라 왕실은 두 집단을 상대할 수 없었다. 정면으로 대응했다면 신라 왕실이 무너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처음에는 가야에 정착하려다가 김수로와의 대결에서 패해 신라로 이주하게 된 석탈해는 막강한 함대의 보유자였다. <삼국유사>에 실린 <가락국기>에 따르면, 김수로는 석탈해를 내쫓을 때 함선 500척을 동원했다. 이것은 500척을 동원해서 추격해야 할 만큼 석탈해 함대도 만만치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런 세력이 신라에 왔으니, 신라로서는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신라 왕실이 선택한 것은, 그런 이주민 집단의 핵심부를 왕실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석탈해가 초대 신라 임금 부부의 여성 후손과 결혼하여 왕실의 사위 겸 양자가 되고, 뒤이어 김알지가 이 왕실의 양자가 되고 초대 임금 부부의 여성 후손과 결혼했다. 이렇게 강력한 외부 세력을 왕실 가족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신라 왕실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성씨는 개인이 아닌 집단을 구별하는 표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석탈해나 김알지가 왕실 가족이 되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 남해왕은 석탈해에게 자기 아들 유리와 동등한 지위를 부여했다. 석탈해도 자기의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석탈해에게 사위뿐 아니라 양자의 지위도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신라 왕실은, 초대 임금 부부인 알영·박혁거세 부부의 여성 후손과 결혼하는 것을 조건으로 외부인들을 박씨 왕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20세기부터는 한국인들의 성씨가 개인을 식별하는 표지로 작용하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한국인의 성씨는 개인이 아닌 집단을 구별하는 표지였다. 옛날에는 가문을 중심으로 경제 활동도 하고 학문 활동도 하고 정치 활동도 했다. 그래서 가문의 명칭인 성씨는 혈족을 식별하는 데 사용될 뿐 아니라 기업·학교·정치집단을 식별하는 데도 사용됐다. 이처럼 성씨가 소속집단 식별의 표지로 활용됐기 때문에, 박씨 왕실에 들어간 석탈해·김알지 혈통은 대외적으로 박씨 왕실의 일원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신라 왕실의 일원이 된 석탈해·김알지 혈통이 자신들을 박씨 왕실의 일원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있다. 그것은 석탈해·김알지 혈통이 박혁거세를 자신들의 시조로 숭배했다는 사실이다.
일례로, 제14대 유례왕은 석탈해 혈통이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는 박혁거세 신당을 자기 시조의 사당으로 참배했다. 박혁거세를 자기 시조로 인정한 것이다. 또 제20대 자비 왕은 김알지 혈통이지만, 신라본기에 따르면 그 역시 박혁거세 신당을 시조의 사당으로 참배했다. 이것은 석탈해·김알지 혈통이 자신들을 박씨 왕실의 일원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석씨·김씨 혈통의 왕들이 석탈해 신당이나 김알지 신당을 시조 사당으로 참배하지 않고 박혁거세 신당을 시조 사당으로 참배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석탈해·김알지 혈통의 왕들이 박혁거세의 후손 자격으로 왕이 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식적인 측면을 본다면, 신라 왕실에서는 언제나 박씨가 왕이 된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석씨·김씨 왕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신라 역사에서 역성혁명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석씨·김씨 혈통이 자신들의 뿌리를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석탈해나 김알지의 혈통을 타고났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인식이 있었기에 자신들만의 족보를 따로 정리하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그들을 석씨·김씨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박혁거세를 왕실의 시조로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의 세부적인 뿌리를 잊지 않은 것이다.
<화랑세기>에 신라 왕비족이 등장하는 이유커다란 가문 내에서 작은 가문들이 독자성을 유지하는 모습은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성씨 제도 즉 성과 씨의 제도에서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낚시' 하면 생각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강태공이다. 기원전 11세기에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강하게 만든 사람이다. 우리는 그를 강(姜)이라는 성(姓)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여(呂)라는 씨로도 기억되었다. 사마찬이 지은 <사기>의 강태공 편(정식 명칭은 '제태공 세가')에 따르면, 강태공 집안의 명칭은 크게는 姜이지만 작게는 呂였다. 姓은 姜이고 氏는 呂였던 것이다. 강이라는 성을 가진 커다란 가문 속에, 여라는 씨를 가진 작은 가문이 있었던 것이다.
비슷한 문화가 신라 왕실에서도 용인됐다. 박이라는 성을 가진 왕실 안에 석·김의 분파가 용인됐던 것이다. 석·김 혈통은 박씨 왕실의 일원이 된 뒤에도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박씨 왕실이 이를 제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 제지할 수 없었던 것은 두 혈통이 처음부터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김의 압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이들을 식구로 받아들인 박씨 왕실 입장에서는 그들의 그런 활동을 제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박씨 왕실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결혼제도를 활용했다. 석·김 두 혈통이 초대 임금 부부의 여성 후손과 결혼하도록 하고 그런 결혼을 한 사람만이 왕위 계승권을 갖도록 한 것이다.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신라 왕비족이 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초대 임금 부부의 여성 후손과 결혼해야만 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여성 후손들이 신성시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여성들이 왕실 내에서 왕비족이란 신성한 그룹으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이다.
알영·박혁거세 부부의 여성 후손을 왕비족으로 묶고 이 왕비족과 결혼해야만 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석·김 혈통의 남성이 왕이 된다 해도 박씨 왕실은 '이 왕실은 여전히 우리 것'이라는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왕비들의 혈통으로만 본다면, 박씨 왕실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석·김 혈통이 왕이 된 시절에도 박씨들은 계속해서 영향력을 지키고 왕족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박혁거세 혈통이 728년 만인 912년에 왕권을 회복한 사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신라 역사의 진짜 모습은...이 같은 신라 왕실의 독특한 문화를 신라인의 문헌을 통해 엿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행운이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유교주의적 관점으로 신라 역사를 마음대로 재단한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통해서 신라 왕실을 엿볼 수밖에 없다.
남성 중심의 가치관을 가진 김부식과 유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남성인 석탈해와 김알지가 신라 여성 왕족과 결혼해서 박씨 왕실의 일원이 된 사실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박씨 왕실의 일원이 된 석·김 혈통의 왕들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소개할 때, 그들이 박혁거세를 시조로 모셨다는 점은 제대로 강조하지 않고, 그들의 부계 혈통이 석씨·김씨라는 점만 유난히 강조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신라 왕실의 이미지를 바꾸어놓고 나서 약 1세기 반 뒤에 일연의 <삼국유사>가 나왔다. <삼국유사> 역시 신라 왕실이 박씨 왕실이란 점을 강조하지 않고 일부 왕들의 부계 조상이 석탈해·김알지라는 점을 유별나게 강조한 것도 김부식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우리는 신라가 3대 왕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이상한 역사 지식을 갖게 되었다. 왕조시대의 상식인 역성혁명론과 모순되는 지식이 우리 머릿속에 그렇게 해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박·석·김의 세 혈통이 박혁거세를 공동 시조로 모시면서 하나의 왕실을 유지했던 신라 역사의 진짜 모습이 우리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