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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새누리당 당사. 2016년 12월 9일 찍은 사진. 건물 벽면에 “국민 여러분, 한없이 죄송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국정을 수습하겠습니다”라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도동의 새누리당 당사. 2016년 12월 9일 찍은 사진. 건물 벽면에 “국민 여러분, 한없이 죄송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국정을 수습하겠습니다”라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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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새누리당 의원총회가 새로운 당명으로 자유한국당을 잠정 선택했다. 새로운 당명은 비상대책위원회와 상임전국위원회를 통과해야 정식으로 확정된다.

새누리당이 자유한국당이란 당명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보수파 결집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를 연상시키는 자유란 단어를 당명에 넣음으로써 보수적 유권자와 기업인들의 지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언어는 사회적 산물이다. 언어나 용어는 사회 구성원들의 경험이나 사용법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같은 단어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뜻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한국당의 '자유'가 자유민주주의 및 자유시장경제와 연관이 있는지를 판단할 때도, 한국 사회의 정치적 경험을 먼저 살펴야 한다. '자유'란 단어를 썼다고 해서 곧바로 자유민주주의 및 자유시장경제의 옹호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자유당, 사사오입 개헌 등 흑역사

한국 정치사에서 '자유'가 들어간 당명이라고 하면, 이승만의 자유당이 가장 먼저 연상된다. 그런데 이승만 자유당은 국민의 자유와 무관한 집단이었다. 이들은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했다. 시장경제의 순기능도 억압했다. 정치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재벌과 결탁한 것도 자유당이었다. 

자유당의 진짜 존재 의의는 이승만의 장기독재를 돕는 데 있었다. 6·25 와중인 1951년에 창당해 4·19 와중인 1960년에 몰락한 자유당의 업적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1952년 발췌 개헌, 1954년 사사오입 개헌, 1960년 3·15 부정선거다.

발췌 개헌은, 국회에서 개헌안이 부결됐는데도 폭력적 분위기 속에서 강압적으로 재투표를 실시했다는 점, 사전에 공고되지 않은 개헌안을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의결했다는 점 등에서 절차상 무효였다. 1948년 헌법 하에서는 국회가 대통령 선출권을 갖고 있었다. 국회에서 지지를 받지 못한 이승만 정권은 국민 직선제를 통해 정권을 연장시키려 했다. 그래서 벌인 일이 발췌개헌이다.

사사오입 개헌은, 국회의원 203명 중의 3분 2인 136명의 찬성을 받지 못하고 135명의 찬성으로 끝났기 때문에 의결정족수 미달로 인한 무효였다. 그런데도 자유당은 '203의 3분의 2는 135.3이고 0.3은 무시해도 되므로, 135명의 찬성으로 의결정족수가 채워진 것'이라는 억지논리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 개헌은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앰으로써 이승만의 장기 독재를 가능케 한 헌정 농단이었다.   

 사사오입 개헌 당시, 민주당 이철승 의원이 자유당 소속인 최순주 국회부의장의 멱살을 잡는 모습.
 사사오입 개헌 당시, 민주당 이철승 의원이 자유당 소속인 최순주 국회부의장의 멱살을 잡는 모습.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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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뒤인 3·15 부정선거 때 자유당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자유당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위해 억지 열성을 부렸다. 이승만과 자신들의 자유만을 위해 살았을 뿐, 국민의 정치적 자유나 시장의 자유는 안중에도 없었다. 장기독재의 도우미 정당에 불과한 집단이었다.

한국 정치사에서는 그런 것이 자유당이었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은 당명에 '자유'를 넣었다. '자유당' 하면 이승만 자유당이 떠오르고 정치적 자유의 억압과 시장질서의 왜곡이 떠오르는데, 인명진 위원장의 새누리당은 무슨 생각으로 당명에 '자유'를 넣은 것인가?

영국의 자유당, 곡물법 폐지 성과 빼앗겨

만약 이승만의 자유당을 따를 목적이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자유당의 원조 격인 19세기 영국의 자유당을 따를 목적으로 당명에 '자유'를 넣은 것인가? 그랬다면, 19세기 영국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유민주주의 및 자유시장경제와 영국 자유당의 연관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19세기에 보수·자유 양당 체제로 바뀌기 전에 영국의 양대 정당은 토리당과 휘그당이었다. '토리'는 아일랜드에서 도적떼를 가리키던 말이고, '휘그'는 스코틀랜드에서 폭도를 가리키던 말이었다. 토리와 휘그는 각각 상대편에서 지어준 당명이다. 상대방에 대한 경멸을 표시할 목적으로 붙여준 당명이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레 사용된 것이다.

토리당과 휘그당이라는 촌스런 당명이 보수당과 자유당이라는 근사한 당명으로 바뀐 본질적 계기는, 1776년 미국 독립전쟁과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에 번진 변화의 열풍이었다.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혁명을 통해 파워를 과시한 자본가 계급이 선거권을 요구하고, 자본가의 라이벌인 노동자 계급도 이 흐름에 동조하면서 생겨난 정치 변화가 당명 개정의 촉매제가 되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선거권 획득 및 정치적 진출은 영국 정치구조의 변화를 초래했다. 옛날처럼 귀족 중심의 정치를 했다가는 의회에서 발붙이기 힘든 세상이 됐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토리당과 휘그당이 스스로를 개조하고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온 당명이 보수당과 자유당이었다.

명칭에서 느낄 수 있듯이, 보수당은 기득권층의 이익을 더 많이 대변했고 자유당은 신진 세력의 이익을 더 많이 대변했다. 인명진 위원장의 새누리당은 보수파를 결집할 목적으로 당명에 '자유'를 넣었지만, 원조 자유당인 영국 자유당은 기득권층보다는 신진세력의 이익을 더 많이 대변하는 정당이었다.

새누리당이 진짜 의도한 게 이런 것이었을까? 사회 신진세력을 대변한다는 숭고한 뜻을 품고 영국 자유당의 '자유'를 차용한 것인가? 만약 이런 의도를 갖고 자유한국당 당명을 선택했다면, 이번 토요일부터 새누리당은 덕수궁이 아닌 광화문 광장 쪽에 전용 천막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새누리당의 진짜 의도는 19세기 영국 자유당처럼 신진세력을 대변하겠다는 게 아니라, 정치적 자유와 자유무역을 옹호한 영국 자유당의 노선을 따름으로써 보수층과 재벌의 지지를 받겠다는 데 있다. 그런데 19세기 영국에서 정치적 자유와 자유무역을 실현시킨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막상 확인하게 되면, 전혀 다른 판단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시장질서와 자유무역의 발전을 막은 세력은 농업귀족들이었다. 같은 시대의 조선왕조에 있었던 양반 지주층과 동질적인 세력이었다. 현대 한국으로 치면 재벌과 유사한 세력이었다.

영국의 농업귀족들은 곡물시장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값싼 외국산 곡물의 수입을 금지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곡물법이다. 식량 자주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제정된 법률이지만, 실제로는 농업귀족의 시장지배를 돕기 위한 악법이었다. 이로 인해 서민층은 없는 형편에도 비싼 국산 곡물을 사먹어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곡물법 폐지운동이다. 값싼 곡물의 수입을 허용해서 서민층의 생계를 돕고 농업귀족들의 독점을 깨기 위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열렬히 지지한 정당이 자유당이었다.

하지만 정작 곡물법을 폐지한 장본인은 자유당이 아니라 보수당이었다. 보수당 출신의 로버트 필 총리가 곡물법 폐지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처음엔 곡물법 폐지를 반대했지만, 사회 현실을 무시하고 이런 법을 옹호했다가는 당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당내 반발을 억누르고 폐지를 관철시켰다. 이로 인해 시장질서와 자유무역의 옹호자라는 칭송은 보수당 정권의 필 총리가 받게 되었다.

 로버트 필.
 로버트 필.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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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자유당은 곡물법 폐지를 위해 열심히 싸웠지만, 최종 성과는 보수당한테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서 자유당은 2% 부족한 정당이었다. 자유당은 20세기 전반에 영향력을 잃고 노동당에게 자리를 내주게 됐다. 보수·자유 양당 구도가 노동·보수 양당 구도로 바뀐 것이다. 

영국 자유당은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정적인 열매는 보수당에게 양보했다. 겸양의 미덕을 발휘했던 것이다. 당명에 '자유'를 넣고 싶어 하는 새누리당이 원하는 것도 그런 것일까? 보수파와 재벌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가 최종 성과는 경쟁 정당에게 양보하는 그런 미덕의 당이 되고 싶은 것인가?

자유란 말은 한없이 좋은 말이다. 하지만, 당명에 붙은 '자유'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언어나 용어는 사회적 산물이므로, 당명에 자유를 넣을 때는 정치사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 자유당은 자유를 억압하다가 몰락했다. 영국 자유당은 경제적 자유와 자유무역을 추구했지만, 막판에 2% 부족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명에 들어가는 '자유'는 한국에서는 아주 부정적 이미지를 풍기고, 19세기 영국에서는 어딘가 살짝 부족한 이미지를 풍겼다. 그렇기 때문에 새누리당의 이번 작명은 그리 적절치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공자는 <논어> 자로 편에서, 정치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름을 바로잡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이치에 맞지 않고,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이것이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이다. 

탄핵정국으로 위기에 처한 새누리당이 새 이름으로 활로를 찾고자 한다면, 공자의 말처럼 이름을 바르게 하는 일, 즉 정명에서부터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한국 정치사에서 '자유의 증진'보다는 '자유의 억압'을 의미하는 이승만 자유당의 '자유'를 당명에 넣는 것은 새누리당의 앞길을 스스로 우습게 만드는 일이다. 19세기 영국 정치사에서 시장질서와 자유무역의 증진이란 성과를 보수당에게 빼앗긴 영국 자유당의 '자유'를 당명에 넣는 것 역시 새누리당의 앞날을 우습게 만드는 일이다.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의결되던 지난해 12월 9일, 새누리당 당사 앞을 지나다 보니 "국민 여러분, 한없이 죄송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국정을 수습하겠습니다"라는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새누리당이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루라도 빨리 국정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원점으로 돌아가 공자 말씀대로 정명(正名) 단계부터 새롭게 밟아 나가는 것이다.


#새누리당#자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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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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