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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마르탱 파주는 작가를 꿈꾸는 지망생들에게 하나의 길잡이가 되는 모범적 성공사례다. 프랑스 문학의 오늘을 짊어진 유명 작가가 되기까지, 한국에 번역돼 소개된 책만 십여권에 이르는 베테랑 소설가가 되기까지 파주가 걸어온 길은 범상치 않다. 작가가 되기 위해 단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길 거부한 그는 심리학, 언어학, 철학, 사회학, 예술사 등 일곱개의 학문을 공부했고 야간경비원, 페스티벌 안전요원 등 다양한 직업도 거쳤다.

허먼 멜빌이나 마크 트웨인, 레프 톨스토이가 그랬듯 특별한 삶을 살아야 특별한 글을 쓸 수 있다고 믿은 것일까? 꾸준히 자신의 경계 너머 새로운 것과 마주하기를 선택한 파주의 소설은 실제로도 꾸준하고 완연하게 진화해왔다.

데뷔 당시부터 완성된 소설을 써낸 수많은 천재들과 달리 파주가 걸어온 길은 한 소설가의 좌충우돌 성공기처럼 보인다. 발표하는 매 작품에서 이전과 다른 성취를 거뒀고 그 속에서 어린 시절 겪어낸 작은 파동들을 녹여내온 그는 어느덧 데뷔 17년째를 맞은 중견 작가가 됐다. 완성한 소설을 들고 출판사를 찾은지 일곱번째가 되어서야 첫 책이 출간, 독자와 만날 수 있었던 그로선 괄목할 만한 일이다.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 책 표지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책 표지 ⓒ 열림원
파주의 신작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는 기발한 상상력이 깃든 일곱 편의 소설 모음집이다. 실린 소설 모두는 비현실적인 설정에서 시작해 흥미로운 전개를 거듭하다 예기치 않은 곳에서 끝을 맺는다.

그 과정에서 현실사회에 의미 있는 여러 개의 화두가 불현듯 떠올랐다 이내 사라진다. 독자는 빠르게 변화하는 파주의 소설로부터 저마다 복잡한 현실 가운데 유효적절한 질문 하나씩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역발상의 미학을 장기로 삼는 파주의 소설집은 시작부터 대놓고 참신하다. 첫 소설은 '대벌레의 죽음'으로 많은 단편집이 그렇듯 실린 소설 가운데 가장 흡인력 있는 이야기다.

어느날 주인공인 라파엘의 집에 다짜고짜 경찰 한 명이 들이닥친다. 그는 라파엘이 살해당했다는 신고를 접수했다며 현장을 차단하고 증거를 수집한다. 라파엘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항변하지만 경찰은 이미 진범이 자수했다며 그가 살해당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당혹스런 설정 가운데 독자는 살아 있고 존재한다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지를 되묻게 된다.

시종 눈을 뗄 수 없는 첫 이야기가 끝난 뒤 시작되는 두 번째 소설은 표제작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다. 불과 열댓 페이지짜리 짧은 단편으로 얼마간의 시간 동안 내가 되고 싶다며 찾아온 남자와 나눈 대화가 담겼다. 주인공은 자신이 되고 싶다는 낯선 사내와의 대화를 통해 타성에 젖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 스스로가 자신은 물론 다른 누구도 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당신에 대한 정보를 얻기 시작한 지 벌써 몇 달이 됐어요. 당신에 대해 정말 많이 연구하고 공부했죠. 당연하지 않겠어요? 아무나 되는 모험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당신은 특별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당신이 모든 걸 다 망치고 있더군요."
"난 내 삶에 만족해요."
낯선 남자가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필립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답이 너무 빨랐어요. 상대에게 믿음을 주고 싶다면 그 점에 주의해야 해요. 그런 제스처에는 아무도 속지 않거든요."
"나에 대해 알아봐도 좋다고 허락한 적이 없는데요. 누군가가 엿보고 있다는 건 매우 불쾌한 일이에요."
"오, 걱정 마세요. 당신의 삶은 그리 독특하지도 참신하지도 않으니까. 다만 내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당신의 삶은 쉽게 모방할 수 있는 삶이었어요. 그래서 당신을 택했죠."

(...)
낯선 남자는 진심으로 유감스러운 듯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필립은 자신이 옷을 정말 형편없이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옷들은 스타일이나 조화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샀던 옷이었다. 외모에 대한 무관심은 그가 우울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증거였다. 남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진실을 말하자면, 당신이 자신에게 싫증 났다는 거에요."

-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 중에서


세 번째 작품 역시 기상천외한 발상이 돋보이는 단편이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트리스탕은 어느날 자신을 찾은 방문객들로부터 자신이 호모 사피엔스 인슐라리 종이라는 사실을 듣게 된다. 그는 곧 멸종위기종으로 등재되고 국가는 마지막 남은 호모 사피엔스 인슐라리인 그를 수집가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시행한다.

이밖에도 범죄자가 되기 위해 직업소개소 상담원에게 자신이 얼마나 범죄자에 적합한 인물인지를 설득하는 이야기 '평생직장에 어울리는 후보', 자기 내면으로 이사를 갔다고 믿는 사내의 이야기 '내 집 마련하기',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였던 벌레가 사라지며 도시 전체가 텅 빈 무언가로 변모한다는 단편 '벌레가 사라진 도시', 생존에 위협이 되는 모든 물건을 파괴하는 한 남자의 투쟁기가 세상과 부딪히는 이야기, '세계는 살인을 꿈꾼다'가 차례로 머리를 들이민다.

"나는 내 삶이 놀랍고, 아름다우며 기묘하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에 실린 모든 단편은 놀랍고 기묘한 설정으로 독자를 당혹케 하고 그로부터 문학적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한다. 황당무계하게 보이는 설정으로부터 일상화된 것을 낯설게 만드는 파주의 소설은 일상에 젖은 독자들에게 활기찬 감상을 남겨줄 게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 / 열림원 / 마르탱 파주 지음 / 김주경 옮김 / 캉탱 포콩프레 삽화 / 2016. 09. / 12000원>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

마르탱 파주 지음, 김주경 옮김, 열림원(2016)


#아무도 되고 싶지 않다#열림원#마르탱 파주#김주경#김성호의 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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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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