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를 노파에게 들려주고는 알아듣기 전까지 붓을 놓지 않다 붓으로 세상을 바꾸려던... -이상옥의 디카시 <백거이의 묘> 무릇 세상의 모든 시인은 이상주의자일 터. 붓 한 자루로 세상을 바꾸려 하기 때문이다. 백거이가 특히 그랬다. 백거이는 소통을 중시했다. 시인마다 시를 쓰는 스타일이 있기 마련인데, 그걸 살펴보면 그 시인의 성향을 알 수가 있다.
중국의 3대 시성 하면 이백, 두보, 백거이를 들곤 한다. 이 세 시인은 시 쓰는 스타일이 자못 다르다. 이백은 천재 시인으로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일필휘지로 시를 쓰고 퇴고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현종이 모란꽃을 양귀비와 같이 구경하며 그 흥취를 드러내기 위해 이백을 불러 시를 짓게 하려는데, 이백은 술집에서 취해 있어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물을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하고는 현종 앞에까지 끌려오다시피 했건만 일필휘지로 <청평조사> 3수를 써 내려갔다는 일화는 이백의 시 쓰는 스타일을 잘 보여준다. 이백과는 달리 두보는 열 번을 고치고 또 고쳤다는 것.
백거이는 초고를 쓰고는 글을 모르는 노파에게 먼저 들려주고, 그 노파가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고쳤다. 이백은 하늘이 내려준 시를 받아썼으니, 논외로 하고, 두보는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고 고치는 완벽주의자라면 백거이는 독자 중심주의 시인이라 할 만하다.
백거이가 섬서 주지현 현위(縣尉)로 있을 때 벗들과 선유사(仙遊寺)를 유람하면서 현종과 양귀비의 일을 상기하는 가운데 벗들이 현종과 양귀비에 관한 시를 쓰라는 요청에 결국 <장한가(長恨歌)>를 썼다.
백거이는 조회도 보지 않고 짧은 봄밤을 한탄하며 중천에 해가 떠서야 일어나는 황제를 비난하며 교태를 부리는 후궁 삼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양귀비를 풍자했다. 그의 붓 한 자루가 세상을 얼마나 바꿨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백거이는 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낙양의 용문석굴을 둘러보고 백거이 묘를 찾았다. 대 시인의 묘답게 규모가 컸다. 백거이는 장안에서 조정의 내직으로 일했으나 권세 타툼의 틈바구니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지방 관리를 자청하며 만년에는 벼슬을 버리고 낙양으로 은거했다 한다.
덧붙이는 글 | 지난해 3월 1일부터 중국 정주에 거주하며 디카시로 중국 대륙의 풍물들을 포착하고, 그 느낌을 사진 이미지와 함께 산문으로 풀어낸다.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스마트폰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감흥)을 순간 포착(영상+문자)하여, SNS 등으로 실시간 소통하며 공감을 나누는 것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