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의 새로운 사극 <7일의 왕비>는 단경왕후 신씨에 대한 드라마다. 신씨는 연산군이 쫓겨난 뒤 쿠데타 세력의 추대로 왕이 된 중종의 조강지처다.
신씨를 왕비로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단경왕후라는 타이틀이 붙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단 하루도 왕비로 살았던 적이 없다. 단 하루도 왕비가 아니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쿠데타인 1506년 중종반정으로 남편(19세)이 왕이 되던 날, 신씨(20세)도 남편을 따라 궁에 들어갔다. 음력으로 중종 1년 9월 2일, 양력으론 1506년 9월 18일이었다. 궁에 들어가는 순간만 해도, 신씨는 곧바로 왕비 책봉식을 거쳐 왕비가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대번에 친인척 관계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그래서 신씨는 퇴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신씨는 연산군의 처조카였다. 연산군이 고모부였던 것이다. 그의 고모, 그러니까 연산군의 왕비인 신씨는 그의 아버지인 신수근의 여동생이었다. 연산군의 처남인 아버지 신수근은 단순히 왕의 인척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좌의정이었던 신수근은 연산군 정권의 실세 중 하나였다.
중종반정 직전에 신수근은 쿠데타에 함께하자는 제안까지 받았다. 신수근은 그 제안을 뿌리쳤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신수근은 연산군이 실패한 왕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세자께서 총명하시니 그분을 믿을 뿐이오"라며 연산군 정권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이렇게 연산군과 친인척 관계로 맺어져 있고 아버지 신수근이 그 정권의 실세인 데에다 쿠데타 주역들의 협조 요청까지 거부했으니, 단경왕후가 쿠데타 주역들의 눈총을 사는 것은 당연했다.
왕비는 단순히 왕의 배우자가 아니었다우리 시대에는, 대통령의 여자 배우자는 당연히 대통령 부인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 사람들은 옛날 왕의 부인도 당연히 왕비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옛날 사람들한테는 왕비 책봉식을 거친 사람이 왕비였다. 우리 시대에는, 대통령의 취임식은 있어도 대통령 부인의 취임식은 없다. 하지만 왕비의 경우에는, 취임식인 책봉식이 있어야 했다. 왕비는 단순히 왕의 배우자가 아니라 왕과 나란히 세상을 이끄는 국모였다. 이렇게 왕비 역시 독립적 지위를 가졌기 때문에, 왕비에 대해서도 별도의 취임식을 요구했던 것이다.
신씨는 입궁 뒤에 곧바로 퇴출 압력에 시달렸다. 그래서 책봉식을 치르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가시방석에 앉아 있다가 7일 만인 양력 9월 25일 궁에서 쫓겨나, 세조(수양대군)의 사위인 정현조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중종 1년 9월 9일 자(1506년 9월 25일) <중종실록>에 따르면, 20명 가까운 쿠데타 주역들이 다소 중립적인 영의정 유순을 앞세워 중종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쿠데타 주역들은 유순의 입을 빌려 "신수근의 딸이 중전이 되면 민심이 불안해지니, 사사로운 정을 끊고 밖으로 내치소서"라고 압박했다. 중종이 "말씀하시는 바는 맞습니다만, 그래도 조강지처인데 어쩌겠습니까?"라고 회피하자, 이들은 "신들도 이해는 합니다만, 나라를 위한 큰 틀에서 보면 어쩔 수 없습니다"라며 "머뭇거리지 마시고 속히 결단하소서"라고 재촉했다. 결국, 중종이 물러섰다. 그 날 신씨는 그렇게 이혼당하고 궁에서 쫓겨났다.
중종은 쿠데타 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왕으로 추대된 탓에 아무 힘도 없었다. 그냥 허수아비였다. 그래서 부인을 붙들어둘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생이별을 했다. 1499년에 결혼했으니 결혼 8년 차 되는 해에 가정이 파탄된 것이다.
인왕산 바위에 치마 널었던 사연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던 신씨는 그 뒤 정현조의 집을 포함한 궁궐 주변의 집들을 옮겨 다니며 거주하면서 '1인 시위'를 자주 벌였다.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널어놓는 방식이었다.
이 일로 그 바위는 치마바위로 불렸다. 남편에게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메시지를 전함과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처지를 호소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신씨의 1인 시위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재야의 개혁파 선비들을 중심으로 동정론이 확산될 정도였다.
하지만, 중종과의 재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종이 왕이 된 뒤 장경왕후 윤씨와 재혼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장경왕후가 중전 된 지 8년 만에 죽자, 신씨와 중종의 재결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강하게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신씨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연산군을 몰아낸 세력은 연산군과 신수근과 신씨를 한데 묶어 구시대 인물들로 처리했다. 이런 전제 위에서 중종을 왕으로 모셨다. 그렇기 때문에 중종이 신씨와 재결합하는 것은 중종을 왕으로 만든 전제를 허무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종의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종 정권은 물론이고 중종 자신도 재결합을 추진하지 않았다. 물론 중종은 신씨한테 연민과 관심을 표시했다. 하지만 재결합 요구만큼은 들어주지 않았다.
중종은 신씨와 헤어진 지, 그러니까 임금 된 지 38년 뒤인 1544년 5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때 신씨는 58세였다. 그리고 신씨는 종종의 아들인 인종 임금 때를 지나, 중종의 또 다른 아들인 명종 임금 때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1557년, 신씨 나이 71세 때였다.
이때까지 신씨는 단 하루도 왕비로 산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동정 여론이 강한 덕분에, 중종의 아들인 인종 때 폐비에 준하는 대우는 받았다. 인종은 자기 어머니 장경왕후가 신씨의 불행을 딛고 왕비가 됐기 때문에 신씨한테 죄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신씨를 폐비에 준하는 사람으로 대우함으로써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세상 떠난 후 추숭... 생전엔 하루도 왕비였던 적 없었다하지만 폐비에 준하는 대우를 했을 뿐, 정식 왕비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왕비로 살다가 궁에서 쫓겨난 사람과 같은 수준의 대우를 해줬을 뿐이다. 신씨는 그런 대우를 받다가 1557년 눈을 감았다.
인종의 조치는 사람들이 신씨의 지위를 오해하도록 만들었다. 신씨가 궁에 들어가서 정식 왕비가 됐다가 쫓겨났다는 오해가 생기게 한 것이다. 7일간 왕비 생활을 하다가 이혼당했다는 잘못된 인식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신씨가 정식 왕비로 인정된 것은 죽은 지 182년 뒤인 1739년이었다. 영조 임금이 그를 왕비로 추숭했다. 단경왕후라는 타이틀이 생긴 것은 이 때문이다.
영조는 신씨를 왕비로 추숭했지, 복위시킨 게 아니다. 신씨를 왕비로 추숭했다는 것은 신씨가 살아서는 왕비가 아니었다는 의미다. 영조가 신씨를 추숭했으니, 그 후로는 사람들이 '신씨는 살아생전에는 단 하루도 왕비가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했어야 한다. 그러나 인종의 조치를 계기로 생긴 오해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7일의 왕비'로 기억했다.
이런 오해를 보고 답답해한 사람이 있었다. <연려실기술>의 저자인 이긍익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중종반정 뒤에 신씨가 아직 왕비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중략)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나갔다고 하니, 이랬다면 애당초 왕비로 책봉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신씨가 살아생전에 왕비가 아니었다는 이긍익의 주장은 상당히 길게 이어진다. 그는 이렇게 열변을 토하며 신씨의 정확한 지위를 알려주고자 했지만, 18세기 사람인 그의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낳지 못했다.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신씨를 7일의 왕비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대중의 뇌리에 한번 각인된 오해는 이처럼 수백 년이 지나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