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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문으로 들었소

 문은희 화백
문은희 화백 ⓒ 이상기

충주에 대단한 분이 내려왔다는 소식이 들린다. 어떤 사람인데? 여류 화가래. 누드를 그린다네 글쎄. 홍대를 나왔대. 그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그 분의 이름이 문은희 화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충주여상 임승규 교장이 문 화백의 집을 소개했다는 얘기도 들리고, 또 가깝게 지낸다는 얘기도 들린다. 임승규 선생이 사진 작업을 하는 분이고 예술에도 관심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의 소외지역인 충주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충주에서 전시회는 열리지 않았다. 2001년 청주 예술의 전당에서 길이가 34m, 40m에 이르는 대작 누드 파노라마를 전시한다는 소릴 들었다. 그러나 그 역시 가보질 못했다. 그렇게 2000년대 처음 10년이 또 흘러갔다.

2010년경 문화백의 소문은 더 퍼져나갔다. 충주시 동량면 화암리에 가면 민들레 라는 음식점이 있는데, 그 근방에 산다. 그 분 자존심이 강해서 아무나 만나주지 않는다. 예술에 관심이 많은 나도 접근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충주의 예술가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소문도 들렸다. 가까이 지내는 분이 김구산, 서박이, 이상범이라는 정도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작품으로 만났소

 뮤지엄 산
뮤지엄 산 ⓒ 이상기

문은희 화백의 그림을 처음 만난 것은 2014년 10월 원주에서다. 그곳 '뮤지엄 산'에서 "사유로서의 형식 - 드로잉 재발견전(Form as Thinking - Rediscovery of Drawing)"이 열린다고 해서다. 생각이 드로잉으로 표출됨을 보여주려는 기획 의도에 관심이 갔다. 그것은 우리말 표현보다 영어 표현 Thinking과 Drawing을 통해 더 분명해진다. 

뮤지엄 산은 2013년 5월 박물관 겸 미술관인 한솔뮤지엄으로 처음 개관했다. 이때만 해도 한솔뮤지엄은 안도 다다오의 건축으로, 제임스 터렐관으로 유명했다. 안도 다다오는 일본인으로, 서양식 콘크리트 건축물을 잘 짓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임스 터렐은 빛의 예술가로, 시각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연 사람으로 알려졌다. 개인적으로 나는 안도 다다오를 좋아한다. 실용성을 바탕으로 예술성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Communication Tower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Communication Tower ⓒ 이상기

2013년 10월 한솔뮤지엄 방문시 나는 박물관의 건축과 미술관의 기획전시 모두 굉장히 만족했던 기억이 난다. 남관,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의 평면을 만날 수 있었고, 권진규, 문신의 입체를 만날 수 있었고,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관 화백이 문은희 화백의 첫 스승이었다. 고등학생 문은희가 1948년 흑석동에 있는 남관 미술연구소를 찾아가 스케치의 기본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 후인 2014년 10월 나는 한솔뮤지엄을 다시 찾게 되었다. 그 때는 한솔뮤지엄의 이름이 '뮤지엄 산'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 청조갤러리에서 스케치, 드로잉, 선의 자동기술(Automatism), 에스키스(Esquisse) 같은 용어를 만날 수 있었다. 에스키스 같은 용어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문은희 화백의 두 가지 유형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운보 김기창을 그린 문은희 화백의 드로잉
운보 김기창을 그린 문은희 화백의 드로잉 ⓒ 이상기

그 중 하나가 드로잉에 해당하는 것으로, 스케치북 또는 종이에 매직으로 표현한 인물이다. 김기창, 천상병, 석불 선생이 그려져 있다. 이들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로 그림, 시, 전각에서 일가를 이룬 분이다. 다른 하나가 수묵 누드로, 붓으로 인체를 표현한 것이다. 동양적인 표현으로는 선묘(線描)에 해당한다. 이들은 모두 선을 연결해 입체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이것을 수묵 누드라고도 부른다. 그러므로 문은희 화백의 누드는 스케치 또는 드로잉의 차원이 아니라 완성된 그림이다. 수묵 누드는 한지에 일필휘지 형식으로 묵선(墨線)을 그어 만드는 것으로, 문 화백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다. 서양의 드로잉 기법을 동양의 재료를 통해 구현한 혁명적인 시도였다. 그 때문에 그녀의 수묵 누드는 국내보다 일본과 프랑스에 더 알려지게 되었다.     

누드 콜라주를 보았소

 누드 콜라주
누드 콜라주 ⓒ 이상기

그렇게 또 2년이 흘렀다. 2016년 9월 24일이다. 충주 관아공원 일원에서 우륵문화제가 열리고 있었다. 마침 관아공원에 충주의 문화관광 홍보 부스가 만들어져 그것을 운영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전에 부스 준비가 덜 된 관계로 여유가 생겼다. 마침 관아공원 바로 옆 문화회관에서 한국미협 충주지부 회원전이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 갔더니 문은희 화백의 누드 콜라주 작품이 하나 걸려 있다.

검은 바탕에 흰 원이 그려져 있는 형식이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 안에 여체가 들어 있다. 마티스(Henri Matisse)의 춤(Dance)을 연상시킨다. 벌거벗은 사람들이 둥그렇게 군무를 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은희의 작품은 사람의 몸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들여다 볼 때만 그것이 나타난다. 그런 점에서 마티스와 다르다. 그래선지 운보 김기창 선생이 문은희의 누드가 마티스보다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림 속의 누드
그림 속의 누드 ⓒ 이상기

내가 뮤지엄 산에서 본 누드 크로키보다 한 차원 높은 작품이다. 이것을 문은희 선생은 누드 콜라주라고 말한다. 이 그림의 제목은 무제(無題: Untitled)다. 나라면 윤회나 해탈 같은 제목을 붙일 텐데 하고 생각해 본다. 누드 크로키가 담백하고 직설적이라면, 누드 콜라주는 중후하고 은유적이다. 중후와 은유가 한 차원 높은 경지다. 문은희의 작품은 이처럼 계속해서 변화해 간다.

나는 전시회에 걸린 작품을 보고 나오면서 방명록에 감상을 몇 자 적는다. 그런데 조금 있으면 문은희 선생이 이곳을 방문할 거라는 소리가 옆에서 들린다. 아 그럼 잘 되었네. 문은희 선생과 이야기도 나누고 점심도 함께 하면 좋겠네. 문은희 화백을 만날 기회는 그렇게 우연히 찾아왔다.   

대화를 나누게 되었소

 홍익대학교 미대 졸업사진: 뒷줄 가운데가 문은희 화백
홍익대학교 미대 졸업사진: 뒷줄 가운데가 문은희 화백 ⓒ 이상기

문은희 선생은 우선 자신만만했다. 고등학교 때 이미 그림에 대한 열정이 있어 남관 미술연구소를 찾아갔다고 한다. 부모님이 신세대이고 사업가여서 딸들이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는 것을 기꺼이 지원해주었다. 6․25사변으로 대학을 못 가고 어머니의 중매로 결혼을 했는데, 결혼조건이 결혼 후 시댁에서 미술대학을 보내주는 것이었다. 사실 시댁에서 그 조건을 들어준 것은, 결혼해 자식을 낳으면 그 꿈을 포기할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1955년에는 4개월 된 아들을 안고 홍익대학 미술대 입학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나중에 문 화백의 아틀리에를 방문해 그 사진을 볼 수 있었다. 학교 화실에 아들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홍대 미대 동양과 교수로는 청전 이상범, 운보 김기창, 천경자 세 교수가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1958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 때는 이미 아들이 둘이나 되었다.

1959년 졸업을 하게 되는데, 그 때는 남편 유학비 대느라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이 돌아와 셋째를 낳은 다음 삶에 회의가 들어 그림을 다시 시작하는데, 그것이 1969년이다. 문은희는 이때부터 화가로서의 열정을 불태운다. 전통적인 산수, 도자기, 감 등에 천착하면서 대단한 예술혼을 불태운다. 그 결과가 1975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열린 문은희 개인전이다. 

 일본에서 인정 받은 4폭 병풍 누드
일본에서 인정 받은 4폭 병풍 누드 ⓒ 이상기

그리고는 이야기가 수묵 누드로 옮겨간다. 문 화백은 신이 난다.

"이건 천운이야 천운,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걸 해 냈는지 몰라. 백 장을 그리면 두세 점 건질 수 있었어. 파지가 그렇게 많이 나는데,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면 거기다 대고 절을 했어. 그때 화선지가 좀 비쌌어! 돈이 없어 쩔쩔매면서도 화선지를 사 가지고 집에 올 때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어."

다음은 그 수묵 누드가 일본에서 인정을 받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것이 1987년이다. 일본 전시의 계기가 된 것은 1987년 조선화랑에서 열린 누드 크로키전이다. 사실 이때 국내 반응은 냉담했다고 한다. 수묵산수에 익숙한 화단에서 누드라니, 정적인 구도를 강조하는 동양화에 동적인 움직임을 강조하다니. 그러나 조선화랑 전시 팜플렛을 받아본 일본의 반응은 달랐다고 한다.

이름이 도쿄와 파리까지 알려지게 되었소

 스트라이프하우스미술관 문은희 전시 포스터
스트라이프하우스미술관 문은희 전시 포스터 ⓒ 이상기

미술평론가 우사미 쇼고(宇佐美省吾)가 찾아와 1987년 우에노에 있는 도쿄도미술관(東京都美術館) 제13회 도쿄전(東京展)에 12점의 누드화를 전시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88년에는 4폭 병풍에 그려진 누드화 대작을 출품, 더 큰 호응을 받았다. 그 때문에 미술전문 출판사인 이와사키(岩崎)미술사에서 화집출판을 제안 받는다. 그 때 나온 화집이 『문은희 수묵화집 나부백태(裸婦百態)』다.

1989년 6월에는 도쿄 록본기(六本木)에 있는 스트라이프하우스(Striped House) 미술관에서 문은희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전시 타이틀은 <수묵화전, 나부백태>였다. 이 때 《신미술신문》기자는 「아트 토픽스(Art Topics)」 칼럼에서 '세계 최초의 수묵화 누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문은희 화백은 이처럼 일본에서 인정을 받는다.

1992년 문 화백의 이름은 프랑스 파리까지 전해진다. 4월 14일부터 27일까지 파리의 한국문화원에서 수묵누드 개인전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프랑스 미술전문지 《오퓌스(Opus)》에 소개되었다. 당시 이 잡지에 소개된 대표적인 인물이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와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다. 요셉 보이스는 백남준의 스승으로 유명한 독일의 행동주의 예술가다. 대화는 이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나는 조만간 문 화백의 아틀리에를 방문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진다.

덧붙이는 글 | [수묵누드의 개척자 소원 문은희 화백의 그림 인생]을 15회 정도 연재할 예정이다. 전통적인 동양산수에서 시작, 수묵 누드를 거쳐 한지공예까지 발전해 간 문은희 화백의 삶과 예술을 정리하려고 한다. 그녀는 수묵 누드를 세계 최초로 시도했을 뿐 아니라, 일본 전시를 통해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았다. 1931년생인 문 화백은 충주시 동량면 화암리에 아틀리에를 차리고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우고 있다.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문은희미술관을 세우는 것이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문은희 화백#수묵 누드#누드 콜라주#도쿄 전시#충주 아틀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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