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이 22년 만의 물난리를 당했다. 지난 16일 청주에는 300mm가 넘는 물 폭탄이 쏟아졌다. 그래서 도심 곳곳이 쑥대밭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도의원 네 명이 18일 유럽으로 외유성 연수를 떠났다가 호된 질타를 받았다. 이들의 여행에는 1인당 5백만 원의 혈세가 들어갔다. 이들 중 일부는 귀국 뒤 자원봉사 하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국민과 도민들의 분노는 식지 않고 있다.
충북 도의원 넷은 재난 발생 직후에 외유를 떠났지만, 재난 발생 전에 여행을 떠났다가 욕을 먹은 왕이 있었다. 충북 도의원들은 저 멀리 서북쪽 유럽으로 떠났지만, 이 왕은 수도 동남쪽 충청도로 떠났다가 욕을 먹었다. 그런데 이 왕을 비판한 사람은 아홉 살짜리 아들이었다. 지난주 첫 선을 보인 MBC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에 나오는 충렬왕(정보석 분)과 세자 왕원(임시완 분)이 바로 그 부자다. 왕원은 훗날의 충선왕이다.
충렬왕은 몽골에 대한 충성의 뜻인 충(忠)이란 시호로 불린 첫 번째 임금이고, 충선왕은 두 번째 임금이다. 한편 충렬왕은 어머니·아버지 양쪽으로 고려 혈통을 받은 마지막 임금인 데 반해, 왕원은 어머니 쪽으로 몽골 피가 섞인 첫 번째 임금이다. 이런 차이는 두 부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
충렬왕이 아들의 질책을 받은 일은 1283년 3월에 있었다. 음력으로는 충렬왕 9년 2월이었다. 한여름과 초가을의 장마나 태풍 피해에 신경이 곤두선 현대 한국인들한테는 양력 3월이 그렇게 걱정스럽지 않다. 하지만, 농업시대 사람들한테는 3월이 민감했다. 본격적인 농사를 준비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충렬왕이 의외의 행동을 했다. <고려사> 충선왕 편(정식 명칭은 '충선왕 세가')에 따르면, 본격적 농사철이 임박한 양력 3월 충렬왕이 충청도로 사냥을 떠나려 했다. 이 당시는 민간경제도 좋지 않았다. 거기다가 백성들이 농사를 준비해야 할 시점에 왕이 개경 밖으로 '외유'를 떠난 것이다.
충북 도의원 넷은 남의 돈으로 여행을 떠났다. 국민 혈세를 사용한 것이다. 그에 비해 충렬왕은 왕실 금고에 손을 댔다. 자기 돈을 쓴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 일로 인해 아홉 살짜리 아들한테 호된 비판을 들었다. <고려사> 충선왕 세가에 이런 기록이 있다.
"충렬왕 9년 2월, 충렬왕이 충청도 방면으로 사냥을 나가려 했을 때, 충선왕은 겨우 아홉 살이었다. 충선왕이 갑자기 울자, 유모가 우는 까닭을 물었다."유모의 질문에 대해, 충선왕은 울면서 아래와 같이 답변했다. <고려사> 속의 어른스러운 문장을 아홉 살짜리 세자의 화법으로 수정했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도 곤궁하고 농사철도 다가오잖아. 근데도 아바마마께서는 왜 멀리 사냥을 떠나시려는 거지?"민간경제도 힘들고 농사철도 임박한 상황에서 충청도로 사냥을 떠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충선왕의 답변이었다. 그래서 울음을 터뜨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충렬왕의 귓속으로 금세 들어갔다. 이때 충렬왕의 답변은 충북 도의원들의 대답과 비슷했다.
"참, 희한한 애야. 하지만, 사냥 갈 날짜를 이미 정해놓았으니, 그 말은 들어줄 수 없겠네."충북 도의원들은 여행 예약을 취소하면 자신들이 위약금을 물어야 하기 때문에 부득이 떠날 수밖에 없었노라고 항변했다. 충선왕은 위약금 이야기 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이미 정해진 일이라 떠나지 않을 수 없다는 답변을 내놓았다.
불발로 끝난, 충렬왕의 사냥 여행
그러나 충렬왕의 사냥 여행은 불발로 끝났다. 몽골 출신 장목왕후가 갑자기 아프다며 자리에 누웠기 때문이다. 장목왕후가 몽골에서 받은 작위는 제국대장공주다. 장(長)공주는 황제의 누나나 여동생, 대장(大長)공주는 황제의 고모였다. 제국대장공주란 칭호를 받을 당시에 황제의 고모였기에, 대장공주란 타이틀이 들어간 것이다.
바로 이 제국대장공주가 눕자, 충렬왕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골의 간섭을 받는 처지라, 몽골 출신 왕비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려 백성들의 생업은 무시하면서도 몽골 출신 왕비의 건강은 무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홉 살짜리 세자의 비판을 받고도 충렬왕이 여행을 강행하자 제국대장공주가 자리에 눕고, 결국 그 때문에 충렬왕의 여행이 취소된 것을 보면, 세자가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눈치를 살핀 뒤에 충렬왕한테 충고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머니를 의식해 아버지의 여행을 비판했을 수도 있지만, 세자 왕원은 표면상으로는 민간경제가 어렵다는 점과 농사철이 임박했다는 점을 명분으로 아버지를 비판했다. 아버지의 행동이 백성들의 눈에 좋지 않게 비칠 거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렬왕 부자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옛날 사람들은 '나랏일을 하는 사람은 재난이 발생한 직후는 물론이고 그 직전에도 항상 백성을 염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마가 발생한 직후는 물론이고, 장마철이나 농사철이 임박한 시점에도 미리미리 백성들을 염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어린 왕원이 아버지를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들 약점 잡아 정치적 곤경에 몰아넣으려 한 아버지그런데 그 부자의 갈등은 그 후로도 끊임없이 벌어졌다. <왕은 사랑한다> 1회·2회 방영분에서도 그런 관계가 묘사됐다. 드라마 속의 충렬왕은 세자 왕원이 몽골 피를 물려받았다는 점을 불만스러워 했다. 그래서 아들의 약점을 잡아 정치적 곤경에 몰아넣으려 했다.
세자 왕원은 아버지보다 정치적으로 유리했다. 몽골의 간섭을 받는 시절이기 때문에 '누가 더 뼛속 깊이 친몽골이냐'가 권력투쟁의 변수로 작용했다. 충렬왕은 몽골 여성을 왕비로 두었을 뿐이지만, 아들 왕원은 몽골 여성을 어머니로 둔 상태에서 몽골 여성을 아내로 두기까지 했다. 그래서 왕원의 존재는 아버지 충렬왕에게 위협이 되었다.
이로 인해 충렬왕 부자는 권력투쟁을 벌였고, 서로 한 번씩 왕위를 뺏고 빼앗았다. 1298년에는 스물네 살의 왕원이 충렬왕의 왕위를 빼앗았다. 하지만 7개월 만에 충렬왕이 '타이틀'을 탈환했다. 그 뒤 10년간은 충렬왕이 왕위를 지켰고, 1308년 충렬왕의 죽음과 함께 왕원이 다시 왕이 됐다.
두 부자가 왕위를 뺏고 빼앗기는 바람에, 이 시기의 고려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난점이 생긴다. 충렬왕이 제25대 주상이고 충선왕이 제26대 주상이지만, 충선왕이 주상이 된 뒤 충렬왕이 다시 주상이 됐기 때문에 두 사람의 재위 기간을 외우기가 무척 복잡하다.
충렬왕의 재위 기간은 '1274~1298년 및 1298~1308년'이고 충선왕의 재위 기간은 '1298년 및 1308~1313년'이다. 이렇게 재위 기간에서부터 역사 독자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이들의 부자관계가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에서 어떻게 묘사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