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가다' 다.
'노가다'의 바른말은 막일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의미라면 건설현장에서 목수라 불리는, 말하자면 엄연하게 기술을 지니고 있는 나는 노가다가 아니다. 하지만 더는 천할 수 없는 '막장' 직업으로 세간에 회자되는 게 건설현장의 노동자들임을 고려하면, 나는 노가다가 맞다.
사실 내 직업을 뭐라 말해 줘야 가장 알맞은지 아직 알지 못한다. 정부 용어로 하면 나는 잊지 않고 꼬박 세금을 내야 하는 일용직 근로자가 맞고, 신성한 노동을 하는 존엄한 인간의 주체성을 고려하면 건설노동자가 맞는데, 신문에서는 아무개라는 이름 바로 뒤 괄호에 '노동'이라 적는다. 노동이 아무개의 직업이라는 뜻이다.
경제적 활동을 하는 사람 중 노동의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터. 그런데도 신문과 방송에서는 '노동'이라는 보통명사를 직업란에 쓰고, 사람들은 귀신같이 그게 비표준어로 '노가다' 라는 걸 알아낸다. 신성하다는 노동을 소비하는 사회의 인식수준이 아직 이 정도다.
내가 노가다 업계에 발을 디딘 건 2011년 여름의 일이다. 나이는 마흔여섯이었다.
그로부터 5년 전, 나는 서울에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경상도 깊은 산골로 귀농하며 회사원으로서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인생의 종착지를 아파트로 결론짓고 싶지 않았고, 소외된 노동이 아닌 주체적 노동의 주인공으로 한 번뿐인 내 삶을 살아내고 싶었다.
귀농을 결심하고 읽었던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처럼 살고자 했다. 정확히 100세가 되자 스스로 곡기를 끊고 존엄한 죽음을 택한 스콧 니어링의 하루 4시간 육체노동과 4시간 지적 활동, 그리고 4시간 친교 활동으로 이루어진 일상은 내 삶의 표상이었다.
펜션을 포기하고 망치를 들어야 했다
시골에 내려온 나는 닭을 길렀다. 닭이 낳은 알을 팔아, 먹고 살았다. 자발적 가난을 선언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 당시 우리 부부는 비교적 니어링 부부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는 듯했다. 아이들은 어렸고 나와 아내는 젊었다. 시골살이 비용이 한 달 50만 원으로도 해결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땐 그랬다.
내가 4년 만에 폐농하고 제주로 이주한 이유는 아주 많았지만, 그중 하나는 공교롭게도 닭 때문이었다. 닭은 매일 먹었고 매일 쌌다. 알도 매일 쉼 없이 낳았다. 따라서 나는 매일 닭을 먹이고 똥을 치우고 알을 거둬야 했다. 부모가 죽어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짐승을 먹여야 하는 축산업의 비애를 절감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닭에 매인 구속감이 절정에 이르자 나는 다시 새로운 삶을 찾았다.
같은 일을 해도 누구는 그걸 기쁘게 받아들이고 누구는 그걸 못 견뎌 한다. 회사도 마찬가지고 축산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자기에게 맞는 일이 있다. 회사와 축산은 나에게 맞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그 두 가지 일에서 벗어난 것을 굉장히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제주에 가서는 '중산간' 깊은, 외딴 마을에서도 외딴, 언덕 위 하얀 집에 살았다. 펜션을 운영했다. 소원대로 적게 벌지만 자유롭게 살았다. 그때가 소박한 행복의 절정이었다. 하지만 거긴 니어링 부부가 살았던 미국의 버몬트 주에서는 너무 멀리 떨어진, 한국이라는 나라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삶의 이상과 비정한 현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근원지는 가까이 있었다. 아이들이었다.
9살 터울의 아들과 딸이 있는데, 아들이 중학교 고학년에 이르자 냉정한 현실이 불거졌다. 대안학교를 권해도 한사코 공교육을 받기를 원했던 아들의 진학문제였다. 시골학교에서는 좋은 성적이 도시로 나가면 나빠지는 도농 간 교육격차 문제가 우리의 일로 닥쳤다. 아들은 보통의 아이들처럼 공부하기를 원했다.
아이는 개별적 존재이자 별개의 우주이기 때문에 아이의 생각은 그것대로 존중받아 마땅했다. 나는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그 존중의 결과는 아비로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으로 귀결됐다. 나는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했다.
생활정보신문을 펼쳤고, 목수라는 단어가 눈에 박혔다. 그 목수가 어떤 목수인지도 모른 채 전화를 걸었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말에 당장 시내 모처로 튀어나갔다. 그때 그 면접관이 바로 건설현장의 목수 '오야지'였다. 그렇게 내 노가다 인생이 시작됐다.
당신이 사는 새 아파트, '메이드 인 코리아' 아니다
고백하자면 지금으로부터 삼십여 년 전,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제법 오랜 세월 틈틈이 방학 아르바이트로 노가다를 뛴 경험이 있어 대강은 그쪽 사정을 알고 있었다. 못 배우고, 욕 잘하고, 술 잘 먹는 거친 사내들에 대해서도 겪어본 경험이 있었지만, 이미 삼십 여년이 흐른 뒤였고 세상은 또 너무 많이 바뀌었다. 잘 알진 못하지만 아마 바뀐 세상만큼의 변화가 있을 거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노가다를 연상하면 떠올리는 흔한 사회적 인식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그때까지 그게 내 업이 되리라곤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배움이 짧고, 말은 거칠고, 말술을 먹는 노가다 꾼들의 습성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땐 그랬다. 해 뜨면 일을 시작하고 해가 져야 '시마이'(끝내다의 일본말로 공사현장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하는 위법한 근무시간도 변하지 않았다. 주말이나 공휴일 일을 해도 평일과 똑같은 일당을 받는 것도, 규모가 작은 현장에는 화장실도 없어 짓고 있는 건물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똥을 싸야 하는 비루한 처지도, 해당 월에 발생한 노임을 두 달 가까이 돼서야 지급하는 몹쓸 관행도 그대로였다.
소위 오피니언리더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는 법치주의가 근간인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노가다하는 사람들을 근로기준법이 소용없는 '게토'에 따로 모아 놓은 형국이었다. 거기에 나라 경제의 근간인 '건설 왕국'이라는 간판을 우뚝 세워 놓고 말이다.
눈에 띄는 변화도 있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대한민국 건설현장에서 한국 국적의 노동자들이 소수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사는 아파트가 최근에 지은 거라면, 짓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메이드 인 코리아'는 없다. '메이드 인 차이나' 아니면 '메이드 인 베트남'이 가장 정직한 표현이다. 몇십 년을 애면글면 모든 돈으로 겨우 장만한 아파트가 누가 지었든 무슨 대수냐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리 간단하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 집에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나라 건설 산업의 미래까지 걸려있다.
그 문제가 내 눈에도 보이기 시작한 건 올해 초 제주도에서의 7년 세월을 뒤로하고 고향인 전주로 이주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파란만장했던 지난 20여 년 '노마드(유목민)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고향에서 나는 소규모 빌라나 상가를 지었던 제주에서와 달리 주로 아파트 현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대단지 아파트를 짓는 건설 현장에 백 명의 노동자가 있다면, 그중 2/3 이상은 중국인 아니면 베트남인이었다. 구조적으로 그래야 했던 이유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일명 '탕뛰기'로 불리는 불법 하도급 때문이었다. 대기업 원청 건설회사로부터 헐값에 공사를 낙찰받은 단종 건설회사가 그나마 이익을 남기기 위한 유일한 출구는 인건비 절감이다.
'탕뛰기'는 열 명이 하루에 할 수 있는 분량의 일을 여섯 명에게 여덟 명 치 인건비를 주고 맡기는 방식을 말한다. 회사에서는 똑같은 일을 적은 돈으로, 여섯 명의 노동자들은 좀 더 일하되 돈을 더 가져가는, 어떻게 보면 둘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방식의 가장 큰 피해는 그들이 지어 올린 건물에 살아야 하는 입주자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
거의 모두 불법체류 신분인 여섯 명의 외국 노동자에게 한국은 빨리 돈을 벌어 떠나야 할 나라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직업적 소명의식이나 작업 과정의 정직함 따위가 아니다. '탕뛰기'에 나선 그들은 그저 최대한 빨리, 신속하게 일을 끝내기만 하면 된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속도전이 아파트 현장에서 펼쳐진다. (자신의 나라에서는 거의 반년 치에 달하는) 한 달 평균 250만 원의 수입을 올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해가 뜨기 전부터 일하고 해가 진 뒤에도 일을 한다. 그렇게 평균 2년을 일하면 수만 리 떨어진 고향 땅에 집도 짓고 가게도 열 수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가난의 수렁에 빠진 가족들을 구하기 위해 한국에서 살인적인 노동 시간과 노동 강도를 감수하는 동안 최대한 빨리, 신속하게 올라가기만 하는 한국의 아파트는 부실의 늪에 빠진다. 그리고 한국의 건설노동자들은 그들이 있어야 할 노가다 판에 설 자리가 없다.
건설사와 건설사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부 언론사의 눈엔, 새벽잠을 떨치고 현장에 나가 뙤약볕 아래서 10시간 노동을 하는 한국인 노가다들이 게을러 보인다. 반면 해가 뜨기 전부터 일을 시작하고 해가 진 후에도 일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싼값에 부지런도 하다. 2년 바짝 벌어 고향에 땅과 집을 사고 가게를 열 수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생산성에 비하자면, 20년을 벌어도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 어디 한 귀퉁이에도 땅 한 평, 집 한 칸 마련할 수 없는 한국인 노가다들은 도무지 성에 차지 않는 무력한 노무자들이다.
비행기 타고 한국에 내리자마자 스스로 불법체류자가 돼 바로 공사현장으로 달려가 아파트를 짓기 시작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10년 가까이 노가다 경력을 쌓아야 기술자 대접을 받고 기술자 일당을 받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비싸게 먹히는 한국인 노동자들. 외국인 노동자에 비해 한국인 노동자는 당장 이익으로 돌아와야 할 비용 대비 가성비가 너무 나쁘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인 브로커를 낀 외국인 건설 노동자들이 서울·경기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있는 건설현장을 잠식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누구든 배우지만 누구나 따라오지 못하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육체노동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는 노가다 판에서 뒹굴면서 아이들을 먹였고, 학비를 댔고, 차가운 잠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 굴러먹든 열심히 성실하게 일을 하면 굶지는 않는다는 속설은 노가다 판에서도 통한다. 그리고 사실 오랜 회사생활과 이런저런 직업을 거치고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성찰할 수 있었다. 그나마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가장 정직한 돈벌이 중 하나가 육체노동이라는 것을 말이다.
'목숨이 아깝거든 나이를 먹어갈수록 돈 버는 일에 머리를 쓰지 마라.'변산공동체에 사는 윤구병 선생의 일침(一針)이다. 몸을 써서 돈을 버는 일은 수학이 아닌 산수에 가깝다. 단순하고 깔끔하되 명징하다. 잠자리에까지 끌고 갈 업무라는 것도 없다. 경제적 활동이 단순하면 삶을 구성하는 다른 활동들은 풍부해진다.
육체노동은 힘들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을 피한다. 육체노동은 직관적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다. 게다가 노가다는 더럽기까지 하다. 정신노동이나 지식노동, 혹은 감정노동 역시 저마다 어렵고 힘든 건 마찬가지다. 차이라고는 말끔하고 세련된 복장과 근무환경 정도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육체노동은 업무가 단순하고 간결하다. 일터를 벗어나면 업무는 끝난다. 반면 정신노동은 업무가 복잡하고 추상적이며, 근무지를 떠나도 완결되지 않은 일들이 난마처럼 머릿속을 떠돈다. 게다가 조직 내 크고 작은 관계의 복잡한 실타래가 풀리지 않고 일상을 옭아맨다.
장점과 단점이 양으로 따지면 피차일반이지만, 그래도 나는 간간이 권해 오는 사무직 일자리를 큰 고민 없이 거절한다. 한 번뿐인 내 삶을 다시 사장님을 위해 쓰고 싶은 마음이 없을뿐더러, 같은 양의 장단점으로도 도무지 차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삶의 질 때문이다.
육체노동을 할 때의 팽팽한 긴장감은 일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넉넉한 저녁 일상이 자리를 잡는다.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가끔 친구들을 만나 술자리를 갖는 그런 단순한 일상 말이다. 육체노동은 고되지만, 지식활동과 친교 생활에 대한 경계를 선명하게 구분해 주는 경제활동이기도 하다. 과거 회사에 다닐 때 퇴근 후는 물론 주말과 연휴까지 끈덕지게 달라붙던 업무와 조직 관계의 복잡함 따위는 완벽하게 없다.
지식노동이 머리와 콘텐츠로 가치를 결정한다면, 육체노동의 가치는 몸이다. 정확하게는 몸에 새겨진 기억이다. 망치질이나 톱질은 조금만 배우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십 년 이상을 해 온 사람의 능력을 금방 따라올 수 없다. 십 년 이상 해 온 사람의 능력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딱 그만큼의 세월이 필요하다. 노가다는 아무나 할 수 있지만 숙련된 노동자가 되려면 그만큼의 세월을 투자해야 한다. 정 할 게 없으면 노가다라도 하지 뭐, 라는 식으로 가치 없이 소비되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노가다는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제주에서 처음 목수 일을 시작할 때 목수 기공 일당이 15만 원이었다. 월평균 20일 노동일수를 계산하면 월수입이 300만 원이다. 대기업도 없는 지방 소도시에서는 적은 수입이 아니었다. 부자로 살 수는 없지만 가난하게 살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당시 함께 일하던 동료 중 일부는 가난하고 '후지게' 살았다. 가정을 원만하게 꾸리지도 못했고 개인의 삶이 엉망인 경우도 종종 보았다.
당시 '데모도'(기술자를 보조해 주는 사람)나 하던 나로선 그들은 훌륭한 기술을 지닌 능력자들이었다. 그 능력만큼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 말처럼 '몸이 너무 힘들어서 마시는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장에서는 일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했지만, 현장을 떠나면 자존감 없는 사람이 됐다. 안타까웠지만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많이 배우지 못했고 자라 온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도 천한 직업으로 치부되는 현실도 있었다. 말하자면 직업에 대한 자신감은 좋았지만, 그 자신감이 자기 삶에 대한 자존감으로 이어지기에는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 썩 좋지 못했다.
노동으로 '사람'을 지켜내는 삶의 이야기그로부터 불과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구세대와 신세대가 섞이면서 노가다 판의 흐름이 점차 바뀌었다. 술은 자제됐고, 거칠기만 했던 현장이 조금씩 합리적으로 바뀌었고, 유흥보다는 가정과 개인의 삶에 먼저 충실해야 한다는 문화가 보편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비중이 점점 늘어났다. 극한의 노동 강도와 오랜 세월 몸으로 기억된 숙련도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멈추었던 노임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분명 이제 노가다도 과거의 노가다는 아니게 됐다.
그렇지만 천한 육체노동으로 분류되는 노가다에 대한 시민의식의 고양은 요원하고 중국과 베트남의 젊은 사람들로 채워지는 건설현장은 더는 젊은 노동자의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3D 기피 업종의 위기는 오래전 시작된 일이다. 문제의 해법은 이런 노동 현장을 덜 더럽고, 덜 위험하고, 덜 어렵게 하면 그만이다. 그건 근로기준법만 제대로 지켜도 상당한 진전을 이룰 수 있는 단순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의 근원은 제쳐두고 더럽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할 만한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을 불법적으로 취업시켜 해결하는 사용자들과 이를 묵인하고 방조하는 정부는 그럴 생각이 아직은 없어 보인다. 예컨대 요즘 아파트는 죄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짓는다는 사실, 그들 중 태반이 불법체류 신분이라는 사실을 정부가 모를 리 없다. 모른다면 직무유기고, 알아도 가만 내버려 두면 그 또한 직무유기다. 이렇게 법이 건설사들로부터 무시되고 정부로부터 유기되는 사이, 아파트와 건물은 속도전으로 병이 들고 한국 육체노동의 미래는 암울하다.
다만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가 미래가 암울한 노가다의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노가다란 단어를 부정적으로 소비하는 시민의식에 대해, 노가다 현장의 부조리를 외면하는 건설사와 정부에 대해 일갈하고 싶어서만도 아니다. 시민의식의 성숙은 세대를 뛰어넘어야 하는 세월의 인내가 필수적이다. 아직은 속수무책인 건설현장의 무법과 정부의 무대책에 대한 개선과 변화는 가장 큰 피해를 보는 당사자들의 아우성이 아니면 스스로 바뀌지 않는다. 어쨌든 세월은 더디지만 조금씩 진보하며 흐르고 있고 당사자들의 아우성은 건설노조를 통해 세력을 이루고 사회적 여론을 환기시키며 작게라도 메아리치고 있다.
이런저런 사회적 경험과 20년 노마드 인생을 살면서 겪었던 삶에 대한 성찰 속에서 나는 육체 노동자로 단련되고 있고 남은 삶도 육체 노동자로 마감 지을 생각이다. 그 중심에는 함께 무거운 자재를 들고 나르고 자르고 이어 붙이는 과정에서 극한의 노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육체노동자로 살아가기엔 도무지 이로울 것 하나 없는 이 땅, 이 사회 속에서 묵묵하고 끈질기게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30년이 넘도록 해가 뜨지 않은 새벽길을 나서 해가 질 때까지 굵은 소금 땀을 콘크리트 바닥에 쏟아내다 '함바집'에서 돼지고기에 막걸리로 하루 치 고된 노동을 씻어내던 늙은 노동자가 거기 있었다. 느닷없이 벼락처럼 떨어진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여덟 어린 나이에 노가다 판으로 뛰어들어야 했던 전교 일등 학생도 거기 있었다.
도박에 빠진 남편에게서 금쪽같은 새끼들을 지켜내기 위해 거친 사내들의 노동판에 뛰어든 젊은 여성노동자도, 친구 따라 무작정 올라간 서울 땅에 손가락 세 개를 묻어놓고 고향에 내려와 노가다를 해야 했던 아이들의 아버지도, 1980년 '광주학살'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전라도 언저리에서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무작위로 삼청교육대에 실어 보내며 시대의 아픔을 고뇌하던 젊은 청년경찰도 거기 있었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 연재는 바로 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노동으로 제 새끼들을 먹이고 노동으로 제 가족들을 지켜내고 오직 노동으로 제 스스로의 삶을 살아냈고 살아내고 있는, 노동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