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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고개인 피암목재를 오르고 있다. 안개비와 하얀 구름에 덮힌 길 위엔 바퀴가 길을 가르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 그리고 숨에 겨워 헐떡이는 신음만이 맴돈다.
▲ 피암목재 하얗게 덮인 고개위의 길벗과 갑돌 두 번째 고개인 피암목재를 오르고 있다. 안개비와 하얀 구름에 덮힌 길 위엔 바퀴가 길을 가르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 그리고 숨에 겨워 헐떡이는 신음만이 맴돈다.
ⓒ JTV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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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이다. 세상이 뒤집어져 거리가 분노와 함성으로 뒤덮이던 날이다. 인터넷 매체에 올린 '자전거 여행기'를 접한 방송국의 PD로부터 연락이 왔다. 고갯길을 넘나들며 삶의 이야기로 엮어낸 자전거 여행이 흥미로웠단다.

다음 날 만나 좀 더 구체적으로 상의를 하게 됐다. 방송으로 다루기가 쉽진 않겠지만 써놓은 글을 바탕으로 잘 기획해보면 작품성 있는 다큐멘터리 하나가 만들어질 것 같다고 했다.

아내와 벗들과 상의를 했다. 다수의 모르는 이들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에서 망설임이 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만이 아닌 자전거 본래의 것을 다루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말에 끌려 승낙했다.

홀로 다니는 것보다는 둘 정도가 다니며 대화를 나누는 형식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몇 가지 테마를 간추려 나갔다. 고개를 다루는 것도 가능하겠고, 50대를 바라보는 중년의 도전기로 다루는 것도 괜찮겠단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여행자의 기록으로 담는 것도 하나로 제시됐다.

두 중년 남성의 가을날 자전거 여행으로 가닥이 잡혔다. 그보다 3년 전 여행의 경험을 들려주며 동행하는 형식으로 결정됐다. 프로그램을 본 누군가가 시청을 통해 자전거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면 성공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제작진은 조금 평탄한 만경강보다는 고갯길을 넘어 다소간의 고생을 극복하는 과정을 내심 원했고, 나 역시 동의했다.

출발하기 전날 동행할 갑돌이 나와 여러 사람 앞에서 다짐했다. 2박 3일간 '고갯길을 만나 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을 작정'이란다. 기대와 두려움을 털어 내려는 단단한 마음가짐이었던 것이다.

내리는 비가 제법 쌀쌀한 아침에 길을 나섰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거리로 나서는 사람들과 함께 힘을 보태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함이 들었다. 자전거와 배낭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달리는 것으로 대신하고 일행을 전주역에서 만났다. 비가 오전에 그친다는 예보를 믿고 코스를 바꾸지 않은 채 예정대로 일정을 시작했다.

에피소드 많은 이 여행의 첫머리에서 첫 사건이 벌어졌다. 출발한 지 20분이 되지 않아 애마인 길숙양의 뒷바퀴에 펑크가 났다. 적지 않은 라이딩 경험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라 당황했다. 스페어 튜브도 준비치 않은 상태라 제작진의 차에 의지해 시내를 다녀왔다. 한 시간은 잡아먹었다. 마음이 급해지니 서둘렀던 모양. 다시 출발한 화면 속에 내 헬멧 턱 끈이 잠기지 않은 것이 그대로 담겨있다.

송광사를 돌아 만난 첫 번째 고비 위봉재. 이곳을 넘어가는 모습 속에 나머지 여정이 담겨있다고 여겨 유심히 관찰했다. 한참을 단련해두더라도 공백이 생기면 풀리는 것이 허벅지 근육인지라 나도 내심 걱정이었다.

'아무래도 저건 고집'이다 싶은데 몇 번의 권유에도 쉼을 거절하고 끝까지 올라가겠다고 버텼다. 숨이 고르지 못하고 무릎과 허벅지, 심장을 지나 턱까지 차오른 버거움이 감지됐다. 갑돌만 모를 뿐 PD와 카메라 감독, 길벗도 느꼈지만 누구도 말릴 수가 없다. 간밤에 한 말 때문이려니 싶으면서도, 이 고개만큼이라도 넘고 싶은 마음을 누가 모르겠는가?

세 번의 권유를 거두고 같이 밟아 나갔다. 기진맥진한 상태지만 어쨌거나 정상에 달했고 위봉폭포 휴게소에서 한숨을 돌렸다. 길이 멀어 바로 출발했다. '여기까진 그랬지만 이 뒤로는 그렇게 넘을 수도 없고 페이스 조절을 잘 해야 달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문하고 달려나갔다.

굽이친 고개가 뒤로 내려다보이고 힘겨운 오르막을 버텨내는 갑돌(뒤)과 길벗(앞)
▲ 위봉재를 오르는 중 굽이친 고개가 뒤로 내려다보이고 힘겨운 오르막을 버텨내는 갑돌(뒤)과 길벗(앞)
ⓒ JTV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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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리 방향으로 길게 내리 달려 동상저수지를 돌게 됐다. 가장 난코스인 피암목재 초입에서 늦은 점심을 했다. 문을 연 식당이 별로 없어 겨우 슈퍼에서 컵라면과 즉석밥으로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갑돌이 지쳐가고 있음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얕은 오르막만 만나도 버거워하는 게 역력했다. 위봉재보다 거리도 두 배, 높이도 150m 이상은 더 되는 550여m의 피암목재에 안개가 가득 피어오르고 있었다.

간밤의 공언과 오전의 패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페달을 밟다가 얼마 못 가 내려서 걷고 그것도 지치면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땀을 닦을 여유도 사라졌다. 차의 발길이 뜸한 고갯길에 숨소리와 발소리만 안개에 가둬진 듯 메아리쳤다.

그러기를 몇 번, 드디어 뿌옇게 드리워진 안개비 속에 평평한 고갯마루가 나타났다. 하늘 가득한 안개만큼이나 하얗던 머릿속 어둠이 걷히고 밝아졌다. 내가 느낀 딱 그만큼을 갑돌이 느꼈을 것이다. 해냈다는 기특한 마음은 잠시의 환호로 떠나보내고 내리막길을 재촉했다. 다시 30여 분을 달려나가니 용담호가 보였다.

마침내 하얗게 안개비가 드리운 피암목재 정상에 오르다. 머릿속도 하얗다.
▲ 피암목재 정상에 오르다 마침내 하얗게 안개비가 드리운 피암목재 정상에 오르다. 머릿속도 하얗다.
ⓒ JTV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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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을 띄워 놓은 채 다리 건너에서 기다리는 제작진에게 무전을 보내야 했다. 다시 길숙 양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이미 시간이 한참 늦어 오후 6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반복되는 지체에 짜증이 밀려왔지만 달리 방법도 없었다. 드론 촬영과 스페어 튜브 교체를 하고 바로 달리는 것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라이트를 켜고 달리는데 얼마 못 가 제작진이 일러줬다. 내 거 라이트가 꺼진 것 같다고. 다행히 준비한 보조배터리를 연결해 다리 달렸다. 갑돌의 에너지가 바닥난 듯했다. 어두워지면서 동반되는 막연한 두려움이 일었다. 지침과 짜증마저 복합된 버거움이 허벅지에 주는 힘겨움을 배가시켰다.

첫 밤을 묵어가기로 연락해둔 처남이 도착시각이 늦어 걱정이 됐나 보다. 안천으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마지막 8km. 누적된 갈증이 처남이 가져온 곶감과 귤로 해소됐다. 청량감과 든든함을 보충해준 덕분에 동향으로 가는 싸리재를 힘겹게나마 넘어설 수 있었다. 굴러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말을 듣지 않는 허벅지의 근육과 세포들을 쥐어짜고 있었다. 겨우겨우 용쓰며 걸어나가야 하는 상태의 갑돌이었지만 어쨌거나 도착했다.

땀에 온통 젖은채 마중 나왔던 처남이 가지고온 곶감을 다시 먹고 있는 갑돌. 어찌나 달콤했던지 숙소에 도착해 5개씩은 더 먹었던 것 같다.
▲ 꿀맛 같았던 곶감 땀에 온통 젖은채 마중 나왔던 처남이 가지고온 곶감을 다시 먹고 있는 갑돌. 어찌나 달콤했던지 숙소에 도착해 5개씩은 더 먹었던 것 같다.
ⓒ JTV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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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진 일정으로 야간 주행을 해야 했고 예정보다 1시간 반가량 늦은 7시반에 도착했다.
 늦어진 일정으로 야간 주행을 해야 했고 예정보다 1시간 반가량 늦은 7시반에 도착했다.
ⓒ JTV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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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냈다는 성취감과 힘들어했던 버거움이 두려움과 기대를 낳았다. 긴장이 풀어진 채 곤하게 곯아떨어지게 했고, 그렇게 깊은 밤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날이 밝아 다시 만날 길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는 깊은 밤 어딘가에 놓아두었다.

길목마다 우리를 묵묵히 내려다보던 고개는 그 풍경을 어떻게 읽었을까? 가끔 풍경이 걷거나 달려나가는 사람들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곤 한다.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지, 어디서 왔고 왜 가고 있는지, 그 길 끝의 목적지까지 이를 자신감은 충분한지…. 속사정까지 털어내는 경우라면 제법 깊은 조언을 건네지 않을까 싶다. 거친 호흡에 담긴 간절함과 고통을 외면치 않고 털어내는 진심만이 이 대화를 깊게 만들 것이다. 오늘 나는 무엇을 털어놓았을까?

잠결에 틀어둔 TV 화면 속을 가득 메운 광화문 소식이 곯아떨어짐을 가볍게 만들었다.

홍합탕과 김치찌개로 허기를 달랜다.
 홍합탕과 김치찌개로 허기를 달랜다.
ⓒ JTV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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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두바퀴로 만나는 세상'이라는 제목으로 자전거 여행기를 담아보려 합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 매체인 '전북 포스트'에 동시에 보냈습니다.



태그:#자전거로 고개를 오르다, #테마스페셜,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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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는 한의사, 자전거 도시가 만들어지기를 꿈꾸는 중년 남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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