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 제막식을 하기 위해 시인을 찾았다. 지역에서 시인과 함께 땅끝문학회를 활동하는 나로서는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마을 회관에서 저수지를 끼고 돌아 언덕배기에 시인의 선조들이 영면한 곳에 시비가 세워졌다. 언덕에서 바라본 들판에는 어느덧 추수를 기다리는 곡식들이 진한 향을 피고 있었다.
이제 추분(秋分)이다. 낮이 짧아질 것이고 어둠은 길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어둠은 빛과 함께 본래 하나의 몸이 아니었던가. 곡식이 수확된 가을 들판의 허허로움은 그저 외롭기만 할까?
생에 가장 젊었던 시기 혹독한 계절에 맞서 싸운 시인의 모습에 뜻 모를 불두덩이가 보인다. 그것은 삶에 대한 체념이나 세계에 대한 무관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화살촉을 들고 전장에 뛰어들 장수의 풍모를 지녔다. 그 삶 그대로를 표지(標紙)하기 위한 시비를 봤다.
얼마만인가?/ 오랜만입니다!/……// 어디서 발원하여/ 예까지 흘러 왔는지,/ 세월에 부대낀/ 그간의 애틋한 사연일랑/ 누구도 묻지 말세 그려.//……//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가 한 몸 되는 바다공화국!//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로가 한 몸 되는 수평 공화국!// -해불양수(海不讓水) 중.'할아버지'라는 말보다 '할배'라는 말의 어감을 느껴보고 싶을 때가 간혹 있다. 네다섯 살 아이들이 이 빠진 음성으로 부르는 할배는 순수함 너머로 정감이 어려있다. 할아버지의 어원을 살펴 보면, 한 + 아버지이다. 여기에서 '한'은 크다는 말이다. 발음을 더 쉽게 하고자 하는 언어의 속성상 '한'이 '할'로 바뀌었다.
"저는 70년대와 80년대 초반, 정보부와 보안사를 넘나들며 척추가 두 번 부러지면서 박정희와 전두환의 정치 터널을 어렵사리 통과했습니다." - 『유배공화국, 해남유토피아!』 (158p)당대의 혁명시인 김남주와 어깨를 견주는 시인에게 '할배'라는 말은 사실 얼토당토 않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배라고 부르고 싶은 연유는, 어른이 부재한 이 시대에, "우리 함께 부를 뜨거운 노래 하나 되겠다"-합금론(合金論)중, 『후여후여목청갈아』(11p)라는 이 시인의 탈 권위적인 모습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절망의 숲을 거닐고 있는 20~30대 젊은 세대들의 몽니이자 애교일 수 있지 않을까.
79년도에 나온 시집 『후여후여목청갈아』와 85년에 나온 『금지곡을 위하여』는 금서여서 일반 사람들이 볼 수 조차 없는 책이었다. 간혹 의식 있는 대학생들이 다락방에서 이불 꽁꽁 싸매고 봐야하는 시집이었다. 그 후, 30여년이 지나 올해 출간된 『유배공화국, 해남유토피아!』는 정권의 해악 없이 순산한 작품임을 짐작한다면 시인의 지난 예술의 인생도 퍽 고단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독자 입장에서 시인의 시집을 응시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당시 시대에 살았던 시인의 치기와 열정 그리고 고단함이 응축되어 있는 절제된 감성의 시구를 독자는 동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대에 관한 혜안(慧安)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반복되는 역사적 실(失)의 구조에서 인간 개개인이 맺어야 할 연대(連帶)의 귀중함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연대라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감성일까. 더욱이 시인은 왜 시를 쓸까
윤재걸 시인은 1989년 6월에는 '서경원 의원 밀입북사건 특종취재 건'으로 안기부 및 공안 검찰로부터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6차례나 발부 받았다. 시인은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언론자유를 위한 취재원 보호' 논리를 내세워 끝내 '무혐의 불기소처분'을 국가 권력 기관으로 부터 받아냈다.
2001년 4월에는 민주화보상심의위로부터 민주유공자(1980년 8월 동아일보 강제해직 건)와 민주상이자(1971년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배후조종 고문후유)로 인정받았다. 사필귀정이라고 했던가. 민주주의 식당에 진상을 부리던 손님들이 하나 둘, 역사의 도마에 얹어지기는 했지만 무언가 속 시원하지는 않다. 시인이 집필을 그만 둘 수 없는 이유다.
고산(孤山)공화국에 이어 오늘은/ 남주(南柱)공화국의 깃발이 펄럭이는 날/……//해남이여, 오욕의 세월 속에/ 참숯이 되어버린 그대의 자존심 나는 안다.//……//귀양다리 피와 살이 얽힌/ 해남 들녘에 우뚝한 시인 공화국!//……//오늘 나 귀향(歸鄕)이란 이름으로/ 고향 땅에 스스로를 귀양 보냈네.// 두려움 없이 새 세상 기약하며/ 새 나라의 깃발 끝내 보겠네.// 고산(孤山)공화국 만세!/ 남주(南柱)공화국 만세!// 유배(流配)공화국 만세!/시인(時人)공화국 만세!// -유배공화국(流配共和國), 해남 유토피아! 중 (79~84p)시인은 '공화국'이라는 말이 좋다고 했다. 공화국의 어원은 라틴어로 레스 푸플리카(res publica)라고 말하는 데, 말 그대로 공공적인 것(public thing)을 말한다. 여기서 푸플리카라는 형용사는 포풀루스(populus)로 국민(people)이라는 명사에서 파생되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국가(國家)라는 말은 원래 주나라에서 나온 말이다. 왕의 직할지를 제외하고 분봉한 땅을 국(國)이라고 불렀고, 국은 제후의 근거지였다. 아울러 Res Publica의 영어식 표기 Republic이 공화(共和)라고 번역되고 있다. 이는 중국사에서 기원전 841년 서주의 지배층이 여왕(麗王)을 몰아내고 13년간 공위시기가 오는데, 이때 공백(共伯) 화(和)가 천차의 업무를 대신했다고 하는 것에서 공화라는 말이 생성된다. 이 점은 비록 뜻은 다르지만 로마에서 기원전 509년에 왕을 몰아내고 공위가 되어 있었던 사실과 같은 맥락을 보여준다." -신성곤·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해문집/2004),(37,42p) 시인이 보는 공화의 의미는 제후의 국(國)과 의미가 비슷하다. 그러나 그것은 왕이나 식자층이 통치하는 과거의 봉건적인 것이 아니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고, 그들의 의견을 조율할 줄 아는 제국이다.
시인의 고향인 해남은 응당 그런 곳이다. 민초들이 어울리며 통기타 치며 노래 부를 수 있는 곳, 꽃이 피고 지듯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되듯 순리적으로 사는 삶을 꿈구는 곳, 조선시대 유배된 1백 20명의 식자들이 이룬 예술과 지식의 산천에서 경천동지할 개벽의 튼튼한 동아줄로 엮은 깃발을 시인은 상상한다. 깃발을 꽂은 곳이 나라다. 삼산면 봉학리에 위치한 김남주 생가가 그렇고 옥천면 동리길에 위치한 윤재걸 시인의 생가가 그러하다.
'시도 때도 없이 지랄 염병하고 자빠진 시상'(지랄 염병은 욕도 아니다 중, 85p)에서 우리 민초들은
'채널 15의 JTBC 뉴스룸에 서둘러 다가 앉는다' (앵커 브리핑 중, 53p). 박근혜 –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서울 광화문에서 해남 군민광장에서 촛불은 연이어 계속되었다. 그것은 비폭력을 지향하는 혁명이었다. 그것은 시인의 말처럼
'핏빛 분노'였고 소리 없는 함성이었다.
어스름 지는 노을빛의 태양처럼 시인은 자신이 묻힐 터를 골랐다. 시비를 제막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민주 유공자로 지정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의 자리는 국가가 지정한 터도 있었다.
그러나 시인의 걱정은 자신의 터가 아니라 그 앞에 모신 선조들의 예를 하고 싶었다. 자신이 현충원으로 가게 되면 선친들의 묘는 누가 볼 것인가는 염려도 서려 있었다. 시인이 민중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효심을 잃고 싶지 않은 시인의 다짐의 표상이 바로 시비였다. 후학들은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다만, 그 시간이 오래 동안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시인 할배, 아직 써 주셔야 할 시어(詩魚)들이 많습니다. 뜰채는 후배들도 같이 준비하겠습니다."시인의 시비 제막식이 있는 9월 30일 오전 11시 해남군 옥천면 동리길 저수지가 보이는 언덕은 시인 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한 다짐의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