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련은 사무실과 조직체계가 어느 정도 정비되자 11월 초부터 본격적인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첫 활동으로 11월 5일, 사무실 근처 음식점 대우정에서 내외신 기자와 외부인사 초청 다과회를 가지고,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에 반대하는 장문의 성명서 <민주화여! 민주화여! 민주화여!>를 발표한다. 11월 12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는데 이는 미국이 전두환 독재정권 지지를 표시하는 것이라고 보고 이에 대한 한국민의 반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 성명서에서 민청련은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이 '우리의 민주화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독재권력의 지원을 위한 것인가'라고 묻고 전두환 독재정권의 지원을 위한 이번 방한에 단호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레이건 방한 반대투쟁
이 성명서는 단순히 레이건 방한 반대만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이 성명서는 A4 용지 9쪽에 달하는 장문의 문건으로 성명서라기보다는 당시 운동권에 떠돌던 운동론 팸플릿에 가까웠다. 여기서 당시 민청련이 바라보는 정세에 대한 인식과 향후 운동방향과 실천과제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다. 문건의 작성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김근태 의장일 가능성이 높다.
성명서 말미에는 민청련 운동의 방향에 대해서도 정리해 놓았다. 목소리만 높이는 명망가 운동이나 권력이 그어놓은 선 안에 머무는 소극적인 운동을 배격하고 투쟁성에 기초한 조직적 대중투쟁이 청년운동의 방향임을 밝혔다.
레이건 방한 반대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치안당국은 민주인사들에 대해서 불법 연행과 불법 연금조치를 남발했다. 이를테면, 당국의 주요 요시찰 대상이던 학생운동 출신 제적생을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했다.
이때 숭실대 제적생이었던 윤여연은 다짜고짜 경찰의 급습을 받고 연행돼 구로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레이건이 한국을 떠나는 날까지 꼬박 갇혀 있었다. 윤여연은 이 유치장에서 외국어대 제적생인 김성원과 첫 대면을 했는데, 이들은 훗날 민청련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게 된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민청련은 11월 11일에 기독청년협의회(EYC)와 함께 규탄 성명서를 발표했다.
누가 황정하를 죽였는가?11월 8일 서울대에서 레이건 방한에 반대하는 교내 시위가 있었다. 이 시위 과정에서 주동자였던 4학년 학생 황정하가 시위를 주동하기 위해 도서관 6층에서 줄을 타고 5층 난간으로 내려오다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교내에 상주하던 기관원들의 과잉제지가 사고의 원인이었다.
이에 민청련은 11월 30일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와 공동 명의로 <이 땅에서 폭력은 영원히 추방되어야 한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누가 황정하 학형을 죽였는가?'라고 묻고, 1차적 책임은 학원에 투입된 학원사찰요원들에게 있지만 그 배후에서 이들을 '교사하고 명령한' 권력 당국이 진짜 주범이라고 주장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성명서는 아울러 억압과 감시체제를 묵인하고 침묵하는 우리 자신에게도 그 책임이 있음을 고백했다. 또한 '황정하 학형은 영웅인가?'라고 묻고, "아니다. 결코 아니다!...(중략) 그는 연속적인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꿰뚫는다는 진리 앞에 한 작은 물방울이고자 했다. 외롭고 두려운 자기 결단과 희생 앞에 지극히 겸허하게 작아지고자 한 황정하 학형은 그러기에 오히려 위대한 것이다"라고 그 죽음의 뜻을 기렸다.
또한 민청련과 청년단체들은 12월 4일 명동성당에서 황정하 추도미사를 열었다. 추도미사는 명동성당 교육문화관에서 1500여 청년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는데, 함세웅 신부가 강론을 하고 서울대학생 백낙현 군의 추도사 낭독, '학원민주화를 위한 카톨릭 학생 선언' 등으로 진행됐다. 미사 후에는 100여 명의 청년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학원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성당 밖 100m 앞까지 진출했다.
이 추도식장에서 민청련은 고인의 뜻을 기리는 황정하 추모카드를 만들어 300원씩에 팔았다. 이 추모카드에 공동성명서 내용을 담았는데, 당시 재정이 어려웠던 사정도 있었지만 성명서를 판매한다는 것이 집회 참석자들에게 신선하게 느껴졌고, 그래서 호응이 좋았다.
김근태 의장의 수난안기부와 경찰에서는 민청련 간부들을 계속 감시하는 한편 활동을 위축시키기 위해 여러 형태로 위협을 가해왔다. 그 중에서도 김근태 의장이 가장 중요한 타깃이었다. 김근태 의장은 창립총회 때 안기부에 연행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난 이후에도 툭하면 담당서인 종로경찰서에 연행됐다. 민청련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집회 같은 대외 활동이 있을 때마다 경찰들은 김근태를 연행해갔고, 그 과정에서 구류도 여러 번 살았다.
11월 중순쯤 되었을까. 김근태 의장이 종로서에 연행되어 갔다는 소식이 사무실로 전해졌다. 아마도 그 직전에 냈던 레이건 방한 반대 성명서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무실에 비상이 걸렸다.
박우섭 총무와 홍성엽 재정부장이 전화로 회원들을 불러 모으고, 박계동 홍보부장은 언론사에 연락하여 연행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종로 경찰서장에게 전화로 강력히 항의하고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비상을 건 지 한 시간쯤 지나 이해찬, 박성규, 권형택 등 10여 명의 회원들이 사무실에 모였다. 긴급 대책회의를 열어 의논한 결과 종로경찰서로 직접 쳐들어가기로 했다.
실탄이 필요했다. 실탄이란 민청련 입장을 알리는 성명서였다. 우선 급한대로 박계동이 초안한 16절지 한 장짜리 항의 성명서를 쓰고, 연성수 등 집행부원들이 함께 달려들어 수동식 먹지 인쇄기로 200여 부를 인쇄했다.
역전의 용사 이해찬, 박계동이 앞장서고 집행부원들과 회원들 10여명이 뒤따르면서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면서 종로경찰서까지 행진했다. 간간히 "김근태를 석방하라!" 구호도 외쳤다. 사무실에서 종로경찰서까지는 걸어서 5분 거리지만 연도의 시민들에게는 이 시위행렬이 당시 전두환 철권통치 아래에서 보기 힘든 신기한 광경이었다. 종로서에 도착한 이들은 경찰서 마당에서 저지하는 경찰들에 둘러싸였다. 그러자 이들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서장 면담과 김근태 석방을 요구했다. 경찰들과 밀고 당기고 하는 과정에서 이해찬의 안경이 깨졌다.
결국 민청련 담당이었던 정보과 소속 정아무개 형사가 쫓아 나와 정보과 사무실로 안내했다. 정보과에 들어가자마자 박계동, 이해찬이 주동해서 사무실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금방이라도 책상을 둘러엎을 태세로 큰소리로 김 의장 내놓으라며 소란을 피웠다. 한참 소란을 피운 후에야 정보과장이 나와 김근태 연행에 대해 해명했다. 조사 중이니 기다려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자리에서 김 의장의 석방 약속을 받아 내지는 못했지만 민청련의 강력한 항의 의사를 경찰 측에 전했다. 그리고 이해찬 상임위 부의장 폭행에 대해서는 종로경찰서장의 사과와 깨진 안경에 대한 변상약속을 받아냈다. 김 의장은 이번에도 결국 구류 3일을 살고 나왔다.
5분대기조 공동번역실이런 긴급동원에는 권형택이 운영하던 공동번역실이 한몫을 했다. 이 번역실은 권형택이 아현동에 있는 선배 박경희(동국대 74학번)가 운영하는 출판사 지양사 옆에 사무실 한 칸을 얻어 운동권 후배 4-5명과 운영하고 있었다.
이 번역실은 일반직장에 다니는 회원들에 비해 근무가 자유로운 편이라 민청련의 긴급사태가 있을 때마다 일차적으로 동원되었다.
공동번역실은 권형택이 다음 해 민청련 집행부로 들어가기 전까지 책임자가 되어 1년여를 운영했다. 이 번역실에는 오의택, 진재학, 백병규, 김성환, 최보은 등이 있었다.
이 번역실의 일거리는 당시 운동권 선배들이 경영하는 사회과학 출판사에서 주로 얻어왔다. 물론 바로 옆 사무실 지양사도 고객 중 하나였다. 그러나 번역일은 당시 소규모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재정사정이 워낙 뻔한 것이어서 번역료도 쌌고, 결재도 몇 달씩 미뤄지기 십상이라 썩 재미있는 일이 못되었다.
그나마 당시 여의도 전경련빌딩에 있는 현대경영이라는 잡지사에 다니는 천희상(서울대 73학번)이 잡지에 게재할 영어 원고 번역 일을 나눠줘서 큰 도움이 됐다. 원고료도 비교적 괜찮았고, 무엇보다 월말에 꼬박꼬박 결재 받을 수 있었다. 천희상은 나중에 권형택이 번역실을 떠난 뒤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번역실장으로 들어와 앉았다.
공동번역실은 말이 직장이지 선후배들이 모인 동아리 비슷했다. 출퇴근 시간은 정해놓았지만 실제 규율은 느슨했다. 번역 작업을 하다가 오후 3-4시면 모여서 바둑도 두고, 고스톱도 치고, 그러다 술 먹으러 가는 일이 잦았다. 각자의 수입은 자기가 일한 분량만큼 가져가고, 그 중 일정 부분만 사무실 경비조로 내놓는 방식이었다. 일종의 협동조합과 비슷했다. 권형택이 명색이 번역실장이었지만 회사 사장처럼 지시하고 이윤을 챙기는 것은 아니고, 단순 관리자에 가까웠다. 일종의 방장 역할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민청련이 생기고 나서 이 번역실에 변화가 생겼다. 민청련 집행부가 구성되고 사무실을 내고 활동을 시작하면서 번역실이 집행부의 행동대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번역실 사람들에게는 민청련에서 한 달이면 몇 번 씩 동원령이 떨어졌다.
민청련이 사무실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한 긴급대책회의라다든지, 또 김근태 의장이 경찰서에 잡혀가서 항의방문을 해야 할 때면 어김없이 번역실로 연락이 왔다. 막상 직장 다니는 회원들을 근무 중에 불러내기는 어려웠으니 자유노동자인 번역실 사람들이 일차 동원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실 사람들은 자신을 민청련의 '5분대기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