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의장 폭행사건 김근태 의장의 수난은 경찰에 의한 연행과 구류처분으로 그치지 않았다. 1983년 11월 28일, 안기부 수사 1국장 성용욱이 김 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면담을 요청해왔다. 김 의장은 집행부에 대한 안기부의 집요한 협박과 방해에 대해 항의를 전달하기 위해서 만나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면담에 응하기로 하고 약속장소인 신라호텔로 나갔다.
그런데 저녁식사 도중 성용욱이 무례한 언동으로 김 의장을 자극했다. 이에 김 의장이 격분해 상을 뒤집어엎으며 항의했다. 결국 두 사람 간에 치고받는 싸움이 벌어졌고, 김근태 의장은 눈 위가 찢어지고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겨져 입원했다.
당시의 사회분위기에서 안기부 요원의 행패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민청련에서는 즉시 성용욱의 폭력에 대해 고소하는 법적 조처를 취하는 한편 11월 30일자로 폭력사태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2월 9일에는 홍제동 한 중국음식점에서 회원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김 의장 폭행사태에 대한 경과를 보고하고 대책을 협의했다.
안기부는 처음에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부인했으나 민청련의 끈질긴 대응에 결국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했다. 결국 안기부 최 아무개 수사단장이 직접 병원에 찾아와 사과하고 치료비를 변상하는 선에서 사태는 마무리됐다.
블랙리스트 철폐투쟁12월 6일, 전북 이리에서 태창 메리야스 해고 노동자들이 농성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민청련 사무실로 전해졌다. 민청련은 진상조사와 대책 수립을 위해 즉각 박우섭 총무국장을 현지로 파견한다. 박우섭은 이리 노동부 지방사무소 등을 방문하여 진상조사를 하는 한편 농성 현장을 방문하여 노동자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귀경하여 집행위에 출장보고를 했다.
사회부장 연성수는 박우섭 총무의 조사보고를 바탕으로 가톨릭 JOC 등과 함께 공동으로 농성노동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연성수는 인천에서 노동현장 문화패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사귄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김옥섭, 인천 산업선교회에서 일하는 서기화(JOC 회원) 등을 만나 지원방안을 의논했다.
김옥섭은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이후에도 사업주들 사이에 돌고 있는 블랙리스트 때문에 6번이나 더 해고된 전력이 있었다. 블랙리스트는 노동운동을 막기 위한 정부와 사업주의 합작품으로 노동운동에 큰 족쇄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리 태창 메리야스의 쟁의 역시 이것이 문제가 돼 일어난 것이었다.
민청련은 즉시 노동⋅청년운동단체들과 함께 블랙리스트를 철폐하는 운동을 조직했다. 12월 15일 JOC 회장단 단식농성, 16일 인천지역 해고노동자 단식농성, 21일 JOC 주최의 해고노동자를 위한 예배 및 농성에 민청련이 동참했다.
이와 동시에 민청련은 12월 20일, 16개 청년단체 연석으로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이 논의의 결과로 청년단체들은 12월 26일 13개 단체 연합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고 '민주노동운동자 블랙리스트 문제 대책위원회'(위원장 문익환)를 발족하기에 이른다.
야학연합회 탄압 폭로투쟁1983년 8월부터 12월까지 이른바 '야림사건'으로 알려진 '야학연합회' 사건이 발생했다.
치안본부 직속 비밀수사기관이 150여 명의 야학교사들을 불법적으로 연행하고 가택수사를 하는 등 전면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행된 교사들은 수사과정에서 장시간 밀실감금과 잠 안 재우기 등의 가혹행위를 당하며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의식화 교육'을 시켰다는 강제진술서를 요구받았다. 치안본부는 이런 과정을 통해 대학생 300명, 노동자 200명이 연루된 조직표를 작성하고 야학 전체를 사회주의 단체로 낙인찍으며 좌경용공의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민청련은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파헤쳐 전두환 정권이 어떻게 순수한 야학운동을 용공조작하고 있는지 실상을 폭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농협민주화운동과 수세 현물납부운동그리고 1983년에 가톨릭농민회 중심으로 전개된 '농협민주화운동'에도 적극 연대했다.
'농협민주화운동'은 농협이 농민의 경제적 이익을 담보하고 농민이 식량생산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는데 도움이 되는 조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농민의 이익과는 무관하게 외국농산물을 수입해 판매하는 등 농민을 어렵게 만드는 기구로 타락해가고 있던 현실에서 출발했다.
가농은 농협의 문제는 농민이 직접 대표를 뽑지 못하고 정부가 임명하는 데 원인이 있다고 보고 농협민주화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83년 7월 27일부터 '농협조합장 직선제 100만 서명운동 추진 결의대회'를 연합회별로 개최하고 범국민적인 서명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 서명운동에 민청련은 적극 동참하고, 지지성명도 발표했다.
아울러 민청련은 '수세 현물납부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연대를 표시했다. '수세 현물납부운동"은 경남 관방마을에서 가톨릭농민회 주도로 일어났다. 83년 11월초부터 이 마을 농민들은 추곡수매량을 늘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하자 현물(벼)로 수세(농지개량조합비)를 납부할 것을 결의했다.
농민들은 12월 19일, 경운기 17대에 261가마의 벼를 싣고 '수세 현물 자진납부 차량'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12km 떨어진 진주시내의 진양 농지개량조합으로 출발했다. 가는 도중 온갖 방해와 구타를 무릅쓰고 조합에 도착, 잠긴 출입구의 담장 너머로 벼 가마를 던져 넣었다. 이 투쟁으로 이장이 구속되기까지 했으나 전국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한 당국이 농민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 민청련은 이 사건의 경과를 사회에 적극 알려나감으로써 농민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학원자율화조치와 제적학생 복학문제1983년 12월 21일, 이른바 학원자율화조치가 발표됐다. 권이혁 문교부 장관은 전국대학 총⋅학장회의에서 제적학생 1,363명에 대한 복교조치를 발표하고, 학원대책도 처벌 위주에서 선도 위주로 바꿀 것이라고 밝혔다. 이튿날에는 공안사건으로 구속됐던 172명이 석방되고 142명이 복권되었는데 그 중 131명이 학생운동으로 구속 수감되었던 학생들이었다.
제적생 복학 조치는 민청련 활동에 즉각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미쳤다. 민청련의 기반조직에 속한 회원들 중 대다수가 제적생이었기 때문에 이 복학 문제는 자신의 거취와 관련된 중대사였다.
그래서 복학 문제를 둘러싸고 민청련 각 조직 내에서 격렬한 토론이 일어났다. 집행위에서는 집행위원 모두가 민청련 상근 활동으로 복학이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일단 집행위원들은 복학하지 않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그리고 민청련 집행부는 복학 논의가 복학여부를 떠나 민청련 조직을 활성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판단했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공개운동에 소극적이었던 제적생들도 대부분 이 복학논의에는 참여했고, 이 논의를 매개로 미조직 계반을 조직화하여 민청련과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판단이 옳았음이 곧 드러났다.
이렇게 복학논의가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어느덧 해는 기울어 연말이 다가왔다. 민청련은 당시 운동권 사람들에게는 낯선 모임인 대규모 송년회를 계획한다.
마리스타 송년회송년회는 12월 28일 서울 합정동에 있는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열렸다. 2호선 전철 합정역에서 한강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면 병인년(1864년) 천주교도들이 목이 잘려 순교한 절두산 성지가 나온다. 절두산 성지를 오른쪽에 두고 왼쪽으로 꺽어 3-4분 가면 마리스타 수도원이 나온다. 1973년 멕시코 수사들이 세운 수도원이다.
이곳은 2013년 통진당 이석기 의원이 당원들을 모아놓고 강연했다가 내란음모를 꾸민 것으로 기소되어 당 해산의 빌미가 됐던 곳으로 세간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곳은 1980년대 민청련⋅민통련의 민주화운동과 인연이 깊은 장소였다. 6월항쟁 당시 민통련과 국민운동본부의 중요한 결정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1983년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28일 저녁 7시 이곳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민청련 합동송년회가 열렸다. 합동송년회라 이름 붙인 것은 민청련이 주관하는 송년회지만 민청련 회원들 외에 아직 민청련에 들어오지 않은 재야 민주청년들 모두를 초청한 송년회였기 때문이다. 마침 22일에 크리스마스 특사로 130여명의 청년 학생들이 석방되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석방환영회도 겸하는 모임으로 자리가 마련됐다.
민청련 집행부가 공안기관의 방해공작을 뚫고 사무실에 입주한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고, 성명서 한 장에 김근태 의장이 연행되고 구류를 사는 등 전두환 정권 탄압의 서슬이 아직 시퍼런 때라 이 합동송년회를 개최하는 문제를 놓고도 기대(기별대표모임)에서는 논란이 많았다.
기대의 분위기는 신중론이 강했다. 아직 우리의 힘이 약한데 공개적으로 이렇게 큰 집회를 열었다가 저들에게 탄압의 빌미를 줄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 신분이 노출될 수 있는 공개집회란 점도 우려의 이유였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을 비롯한 집행부에서는 이 송년회가 운동권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민청련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회원을 확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기대에서도 결국 집행부의 적극적인 설득에 따라 합동송년회를 열기로 결의하고, 각 출신학교별로 대대적으로 참석을 독려했다. 송년회 장소는 창립총회와 마찬가지로 보안을 고려해 시내 중심가에서 좀 떨어진 합정동 마리스타 수도원으로 정했다.
송년회는 예상을 뛰어넘어 200여 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송년회는 1⋅2부로 나누어 진행했다. 1부에서는 석방된 동지들에 대한 환영회를 진행했다. 박우섭의 사회로, 석방된 청년 40여 명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소개되고 환영과 격려의 박수를 받았다. 김근태 의장의 환영사와 석방자 대표의 답례 인사가 이어졌다.
석방자들은 수감 중에 민청련과 김근태 의장에 대해서 어렴풋이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자기들을 환영해주리라 예상치 못했었기 때문에 감동이 컸다. 그리고 군대를 갔다 온 나이든 제적생들은 학생운동 후에 자신이 선택할 활동지로서 자연스럽게 민청련을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2부에서는 연성수의 사회로 민주화운동상 시상식을 가졌다. 이것은 연성수가 직접 기획한 것인데,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한 해 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활동과 인물에 대해 시상하는 것이었다. 우수성명서상에는 <황정하 학형을 누가 죽였는가!>가 차지했다. 시위 중에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 허리를 다친 연대의 양경희와 외대의 이경옥에게도 상이 수여됐다. 민중가요대상에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선정됐다.
이어서 박우섭의 사회로 흥겨운 여흥시간을 가졌다. 참석한 청년동지들은 투쟁과정의 온갖 시름을 모두 털어버리고 한데 어울려 밤이 깊도록 놀았다.
민청련은 예상외로 큰 성황을 이룬 송년회에 크게 고무되었다. 김근태 의장은 이 송년회를 이렇게 평했다.
"민청련이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한 송년회는 굉장히 열기 있는 모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고, 자신감을 가졌고, 그리고 함께 뜻을 모아서 더욱 전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 굉장한 열기가 민주주의 쪽으로 진군할 수 있는 힘이 됐다."
송년회 모임을 기점으로 민청련은 공개정치투쟁단체로서 대내외에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 1984년부터는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쳐 나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