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하며 반 아이들과 개별적으로 마지막 상담을 해나가는 중이다. 처음 만난 3월에 가졌던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또 지난 1년간 얼마나 성장했는지 짚어볼 수 있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다. 비록 점심시간을 빼앗기고, 방과 후 수업이나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살짝 지장을 받기도 하지만, 서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일은 즐겁기만 하다.
가급적 성적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학급 아이들의 대략 절반은 성적에 도통 무관심하고, 나머지 절반은 과민하다 싶을 만큼 성적에 연연하기 때문이다. 몇몇 민감한 경우에는 학년별, 교과별 내신 등급은 물론이고, 해마다 두세 차례 치르는 수능 모의고사의 영역별 등급과 추이뿐만 아니라, 희망하는 대학의 전형방식과 최근 몇 년 사이의 결과조차 꿰고 있을 정도다.
상담은 대학에 진학하려는 이유를 묻는 데서 시작된다. 사실 처음 만난 학년 초에는 서로 데면데면한 탓에 다짜고짜 대학 이야기부터 꺼냈다간 원만한 관계 형성에 찬물을 끼얹기 십상이다. 아무리 사제 간의 대화라고 해도 첫 번째 만남에선 첫인상이 어떤지, 또 서로에게 바라는 건 뭔지 묻고 답하는 말랑말랑한 이야깃거리가 제격이다.
대학입시를 1년여 앞둔 고2의 2학기쯤 되면,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 시나브로 마무리되어야 할 때다. 장차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심사숙고하고 개략적으로나마 밑그림을 그려야 할 시기라는 이야기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대학에 진학하려는 이유부터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대학, 무슨 학과를 선택할 것인지는 그다음 문제다.
"대학에 가지 않으면 사람대접 못 받는다잖아요."담임과의 상담 분위기가 너무 허심탄회해서였을까. 대학에 가려는 이유를 아이들은 이구동성 이렇게 고백했다. 기대했던 '모범정답'은 전혀 듣질 못했다. 무릇 대학이란 말 그대로 '큰 공부'를 하는 학문의 전당일진대, 원하는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진학하겠다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던 거다. 농일지언정, 대학 합격자가 발표되는 날은 공부로부터 해방되는 '광복절'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아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이따금 학부모들과 상담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예외 없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값비싼 등록금을 감내하고서라도 자녀를 반드시 대학에 보내야 한다고 다짐하듯 말했다. '취직을 위해 필요하다'는 식의 예상 답변은 '대학을 안 나오면 혼처 찾기도 힘들다'는 이유보다도 뒷자리였다.
신분증 발급기관으로 전락한 대학언제부턴가 우리나라 대학은 학문하는 곳이 아니라 '신분증'을 발급받기 위해 가는 곳으로 전락해버렸다. 대학의 관계자라면 이러한 조롱에 발끈할 법도 하건만,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기는커녕 표현이 과하다는 말조차 건네는 이가 없다. 단지 이게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냐고 반문하거나, 우리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면서 슬쩍 발을 뺄 뿐이다.
일선 고등학교 교사들도 한통속이다. 대학에서 더 이상 배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대학에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합격시키지 못해 안달하고 있다. 그 노력의 반의반만이라도 대학이 그 이름에 걸맞은 역할을 다 하도록 우선 요구해야 옳다. 자발적으로 '을'이 되어 대학을 '갑'으로 모시며, 아이들을 무한 경쟁으로 몰아붙이는 건 명색이 교사로서 그들을 기만하는 행위다.
얼마 전 한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는 후배로부터 느닷없는 지청구를 들었다. 요즘 대학생들의 지적 수준이 해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것 같다면서 혀를 끌끌 찼다. 그들이 작성한 서술형 답안을 읽노라면 논리는커녕 비문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말했다. 채 고등학교 1학년 수준도 안 되더라며 헛헛하게 웃었다. 언뜻 고등학교 교육을 타박하는 것처럼 들려 매우 언짢았다.
그의 지적이 옳다고 해도 '화살의 방향'이 틀렸다. 맹목적으로 대학입시에만 매달리다 보니 생겨난 '부작용'일 뿐이다. 세분화된 대학입시 전형에 맞추도록 요구해놓고선 다재다능한 인재를 길러내길 바라는 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다. 곧, 그들이 뽑은 아이들은 비록 편법일지언정 대학의 요구에 충실히 '깔맞춤한' 인간형이니, 고등학교를 나무랄 하등의 이유가 없다.
주지하다시피, 온존한 학벌 구조 아래에서 고등학교는 대학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만 하는 처지다. 그나마 대학의 입학정원이 고등학교 졸업정원보다 많아진 요즘엔 서울과 수도권 소재 대학과 지방의 국립대 정도만 깍듯하게 모시면 된다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흔히 '지잡대'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지방 소재 사립대의 경우에는 고등학교와 '갑'과 '을'의 처지가 바뀌었다.
말이 났으니 이야기지, 고등학교 교육의 수준이 낮다며 나무라기 전에 앞서 대학 스스로의 학문 역량을 성찰해야 마땅하다. 영국의 글로벌 대학평가기관인 타임스고등교육(THE·Times Higher Education) 등이 발표한 세계대학평가순위를 보면, 서울대와 KAIST 정도가 100위 이내에 간신히 포함될 뿐 내로라하는 다른 명문대들은 그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다. 기껏 나라 안에서만 '골목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등록금 오른만큼 대학 교육 수준도 높아졌을까?그럼에도 여태껏 등록금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물가 수준을 고려하면, 우리나라 대학의 등록금이 세계에서 미국과 호주 다음으로 비싸다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아이들이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부르는 연고대의 경우에는, 여느 사립대보다 등록금이 더 비싸 가난한 집 아이들은 성적이 돼도 못 가는 대학이라는 '명성'까지 더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등록금이 오른 만큼 대학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을까. 예나 지금이나 선뜻 동의하는 이를 찾기가 어렵다. 그토록 바라던 명문대에 합격했다며 얼싸안고 기뻐하던 제자가 군 입대를 앞두고 찾아와 겸연쩍은 얼굴로 하는 말이, '대학 공부가 고등학교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거였다. 수업 방식은 차치하고라도, 강의의 수준이 고등학교 때만도 못한 게 수두룩하다며 하소연하기도 했다.
학벌 구조가 온존하는 한, 명문대의 학문적 나태함은 치유되기 힘들다. 고작 몇몇 상위권 대학들의 순위가 위아래로 뒤바뀔 수는 있어도, 우리나라 대학의 전반적인 학문 수준이 향상되기란 백년하청이다. 유수의 세계대학평가순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나라 명문대끼리의 서열 경쟁은 그저 '도토리 키 재기'이자, 치기 어린 자리 뺏기 싸움일 뿐이다.
오랜 기간 학벌 구조가 안겨준 '단맛'에 취해 대학 본연의 가치와 의미를 상실해버린 것이다. 아무리 등록금이 비싸고 강의의 질이 떨어져도, 명문대에 입학하겠다는 아이들이 전국에 줄을 섰다. 그러다 보니 대학은 별다른 위기의식도 없고 최고 교육기관으로서의 사명감도 흐릿해져 버렸다. '다행히' 아이들도 학부모도 대학에서 누구에게 무얼 배우는지는 애초 관심이 없다.
지난해 자녀를 졸업시킨 한 동료 교사는 자린고비로 대학을 다닌다고 해도 최소 1억 원이 더 든다며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아이들의 말마따나, 우리나라에서 사람대접을 받기 위해 사야 하는 '신분증'의 최솟값이다. 학문적 소양이 두루 인정되거나 취직이 보장되지도 않는 종이 졸업장 하나 값이 1억 원인 셈이니, 대학 입장에서 보자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대학엘 가야만 사람대접받는다'는 아이들의 대답1억 원이라는 말에 순간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몇몇 아이들은 조그만 피자집이나 치킨집 하나는 너끈히 낼 수 있는 큰돈 아니냐며 놀라워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이들도 '기-승-전-치킨집'이라는 고달픈 현실을 모르진 않지만, 어쨌든 대학엔 가야 한다며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다잡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대학 진학 이외의 선택지는 없는 듯했다.
그래서였을까. 얼마 전 제주도에서 발생한 한 특성화고 학생의 안타까운 죽음 소식을 접한 또래 아이들의 '냉소적인' 반응이 그리 놀랍진 않았다. 많은 아이들은 이번 사건을 통해 결국 우리나라에서 살려면 어떻게든 대학에 가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같은 또래로서 특성화고 학생을 착취해온 구조적 문제를 개혁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는 '공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번 사건은 '대학엘 가야만 사람대접 받는다'는 아이들의 편견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은 셈이 됐다. 순간, 제자뻘인 아이의 죽음 앞에서 '공부를 못해서 위험한 일자리에 간 것'이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한 서울의 한 특성화고 교장의 말이 떠올랐다. 귀를 의심하게 할 만한 그의 말이 '어떻게든 대학엔 가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아이들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졌다.
앞으로도 십여 명의 아이들을 더 만나야 한다. 그러나 더 이상 '대학에 가려는 이유' 따위는 묻지 않으려 한다. 그래왔듯 아이들은 똑같은 답변을 할 테고, 담임인 나는 또 그렇게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될 테니까 말이다. 요컨대, 아이들에게 대학은 종교였다. '대학엘 가야만 사람대접받는다'는 그들의 태연한 답변이 광신도의 방언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