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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도산 안창호가 말했다고 알려지는 이 문장은 사실 안창호의 말이 아니다. 안창호가 한 게 아니고 윈스턴 처칠이 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것마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것은,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면서 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저 말의 출처를 도산 안창호라고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역사는 너무 쉽게 잊힌다. 불편한 진실이라는 이유로, 혹은 소수의 목소리라는 이유로. 그래서 저 문장은 누가 말했느냐와 무관하게, 너무 가벼이 소비되고 만다. 정말 당신은 미래를 위해 역사적 교훈을 배우는 데에 성실했는가. 이 질문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망각이 죄라면, 우리는 역사 앞에 모두 유죄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 4.3 사건(아래 4.3) 역시 우리는 아는 게 없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이 문제에 무지하다. 내가 학교에서 역사 수업을 받았던 경험을 비추어봐도, 근현대사에 많은 비극들이 있었지만 4.3에 대해 제대로 짚고 넘어갔던 적은 거의 없었다. 책을 통해서 4.3을 알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제주 출신 시인의 4.3 기록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사진.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사진.
ⓒ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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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4.3 관련 서적이 얼마 없는 것, 이것이 제주 4.3 사건이 70년이 지나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이 없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 대표적인 작품이지만, 학교에서 <순이 삼촌>을 가르치면서 시대적 배경으로서 4.3은 작품 독해의 방법론으로서만 집중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도민의 목소리를 좀 더 알기 쉽게, 좀 더 성실하게 기록해낸 책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와 동화책 <한라산의 눈물>은 모두가 어렵지 않게 읽으면서 4.3의 원인과 진행과정, 뒤처리 등의 과정에 대해 알 수 있게 해준다.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을 쓴 허영선 시인은 제주도 출신이다. 석사논문으로 제주 4.3 사건 당시의 아동학살 실태를 연구했으며, 이후로도 제주의 비극을 알리기 위한 작업들을 많이 했을 정도로 허 시인에게 4.3이란 인생 전반에 걸쳐 떼려야 뗄 수 없는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은 최대한 쉬운 어투로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제주 4.3 사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형식을 띄고 있다.

"지금도 제주를 찾는 많은 이들이 "4.3이 뭐냐?"고 묻지. 그것은 비극의 상징 4.3을 캄캄한 동굴에 너무나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탓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한국 현대사에서 이 역사의 이름이 낯설기만 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중략) 아마도 네가 이 이야기를 다 들을 즈음엔 이해하리라고 믿는다. 왜 우리가 이 역사의 진실을 찾아가야 하는지를. 왜 그 진실 찾기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었던 것인지를. 그리하여 제주도가 지금 슬픔과 찬란함의 두 얼굴을 가진 얼마나 모순된 땅인지를 말이다."

4.3은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식에서 일어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해방 이후의 요동치는 정치적 상황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지만, 그런 정치적 대립의 상황에 불을 지른 사건이 28주년 3.1절 기념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념식 당시 어린아이가 경관의 말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하는데, 사과를 요구하며 해당 경관을 쫓아가는 사람들에게  관덕정에 배치되었던 무장경관들이 총격을 가한다. 6명의 민간인이 사망을 하고 8명이 중상을 입는 비극이 일어나게 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정말 단순한 일이었다. 아이를 친 경관이 사과를 했더라면? 물론 역사의 큰 흐름에 그런 사소한 일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겠냐만은, 사람들의 분노를 한편으로는 불필요하게 불러 일으키게 된 측면이 없지는 않다.

3.1절 발포 사건에 항의하는 의미로 3월 10일 제주도는 민관 총파업에 돌입한다. 사과를 했으면 될 문제를 이렇게 키워버렸다. 문제 해결의 초입부터 꼬여버리면 겉잡을 수 없이 문제가 악화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부분에서 미국의 책임도 상당함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은 발포 사건의 원인과 문제 해결보다 '빨갱이' 색출에만 골몰했다고 한다.

미군정은 사건의 원인을 찾고 문제 해결을 하려는 것보다는 좌익을 몰아내는 일에만 더 힘을 쏟고 있었다. 무엇보다 3.1 사건을 좌익의 배후 조종의 의한 폭동으로 몰아붙였다. (중략) 미군 정보 보고서 또한 제주도의 총파업에 대해 "좌익의 남한에 대한 조직적인 전술임이 드러남. 제주도는 인구의 70퍼센트가 좌익 단체 동조자이거나, 관련이 있는 좌익 거점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아이들의 시선에서도 본 제주 4.3 <한라산의 눈물>

 동화책 <한라산의 눈물> 사진.
 동화책 <한라산의 눈물> 사진.
ⓒ 내인생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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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책 <한라산의 눈물>도 있다. 이념대립을 가장한 국가폭력의 한 가운데에서 '미루'라는 남자아이의 관점으로 4.3 사건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위에서 말한 3.1절 기념식의 현장으로 아이들의 입장에서 들어가 보자.

갑자기 모퉁이를 돌던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아이가 말에 치였다!"
대여섯 살 된 한 아이가 기마경찰이 탄 말발굽에 치어 쓰러져 있었다.
경찰은 아이를 친 것도 모르는지 말을 타고 뚜벅뚜벅 앞만 보며 가고 있었다.
"아이고 저를 어째!"
"경찰 놈이 사람을 치고 도망간다!"
"당장 내리지 못해!"

성난 사람들은 경찰을 향해 마구 돌멩이를 던지며 소리를 질러댔다. (중략) '경찰은 왜 총을 쐈을까? 선생님이 경찰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경찰도 양과자를 먹지 말자고 해서 화가 난 걸까?' 미루는 눈물을 매단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이들과 여성은 이런 사건이 있을 때마다 가장 약한 타깃이 되어버린다. 미루의 친구 정이의 어머니도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앞서 허영선 시인의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1948년 12월 '초토화 작전'이라고 불리는 끔찍한 토벌 작전에서 토벌대는 여성들을 달빛에 비추어 아무나 뽑아가서 죽이기도 했고, 그해 5.10 총선거를 피해 산으로 도망간 여성들은 남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도피자의 가족으로 몰려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와 <한라산의 눈물>도 더 약한 자들이 받은 더 가혹한 피해를 기록해놓고 있다. 그 시절, 여성들의 수난은 차마 말할 수 없다. 강제로 술을 먹이고 유린을 하던 토벌대의 악행은 그치질 않았다.

결국 같은 토벌대가 고발하는 사례도 일어났다. 허벅 지고 물 길러 갔다 오다가 붙잡혀 강제 결혼당하기도 했다. 도피자 가족으로 몰린 경우, '순경각시'가 되어야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부지할 수 있던 여인들도 있었다.


"에잇, 이놈의 여편네 저리 비키지 못해! 무장대에게 먹을 걸 주지 말라는 우리 경고를 무시하고 곡식을 내준 건 사실 아닌가? 총부리 앞에서 쩔쩔매며 곡식을 퍼 줄 때는 언제고 이렇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건 뭐지? (중략) 이렇게 증인이 있는데도 발뺌을 하려는 건가? 이 빨갱이들 같으니라고!" 경찰은 손에 쥔 총으로 정이 어머니의 얼굴을 치켜들고는 음흉하게 웃었다.

왜곡된 기억에 맞서기 위해

 왜곡된 기억에 맞서기 위해 비극을 기록한 책들을 읽자.
 왜곡된 기억에 맞서기 위해 비극을 기록한 책들을 읽자.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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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학술적인 기록물들도 꽤 있다. 그것들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검색하다보면,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할 수도 있다. 4.3을 폭동으로 규정하거나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의 선제공격이 있었던 것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극우 논객들의 '연구서'들이 생각 외로 꽤 많다.

꼭 이런 것을 읽지 않았더라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포털 여기저기서 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문제에 대해 이렇게 폄하하고 왜곡하게 되면 이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단순히 남로당의 책임으로만 몰고가는 SNS 댓글에 '좋아요'가 많이 찍힌 것을 보고 저런 왜곡된 발언을 '팩트'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더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4.3 사건을 당사자들의 목소리로 듣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날의 진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와 <한라산의 눈물>은 좋은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살암시민 살아진다(살다보면 살게된다)'라며 살아온 그들의 비극을 읽어내자.


한라산의 눈물 -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던 제주의 역사 4.3 사건

이규희 지음, 윤문영 그림, 내인생의책(2015)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허영선 지음, 서해문집(2014)


##제주4.3##남로당##7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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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읽고 보고 쓰고 있습니다. 활동가이면서 활동을 지원하는 사람입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이런 제목 어때요?>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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