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임실군 성수면 성수리 성수산 자락에 자리한 '상이암'을 방문했다. 성수산은 해발 876m로 임실의 주산이다.
임실문화원 최성미 원장과 임실군 문화해설사 강명자씨와 함께 상이암을 방문하기 위해 성수산 자연휴양림 입구에서 사찰까지 올라가는 길은 나무가 우거져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수시로 숲길을 걷기도 하고 절에서 봉사활동도 한다"는 강명자씨의 차를 타고 절까지 올라가는 여정도중에 강명자씨의 해설을 들었다. 명산이어서일까? 과연 맑은 공기와 산과 나무에서 품어져 나오는 기운이 나른했던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사찰로 올라가는 길은 경사진 길이라 오른쪽 입구에 커다란 바위만 보인다. 대부분 절 입구는 사찰이 잘 보이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별난 모습이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방문객 몇 분과 스님 한분이 차를 마시며 담소하고 있다.
입구 오른쪽 바위 곳곳에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소나무가 심어진 바위 앞에 조그만 제각이 하나 보인다. 제각 속 비석에는 '삼청동(三淸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임실문화원 최성미 원장이 절에 대한 설명을 했다.
원래 '도선암'이었던 절...이성계가 기연을 얻은 후 '상이암'으로 개명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상이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의 말사이다. 875년(헌강왕 1) 도선국사가 창건했고, 1394년(태조 3) 선사 '각여'가 중수하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이곳에 와서 치성을 드리니 하늘에서, "앞으로 왕이 되리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여 절 이름을 '상이암(上耳庵)'으로 고쳤다고 한다.
1894년 동학혁명으로 불타버린 것을 1909년 김대건이 중건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의병장 이석용이 상이암을 근거지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본군에 의해 불탔다. 1912년 선사 '대원'에 의해 재건됐으나 한국전쟁당시 소실됐다가 1958년에 임실군수 양창현이 중심이 된 재건위원들이 빈터에 법당과 요사채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경내에는 무량수전과 요사채, 산신각, 전라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상이암과 부도 3기가 있고 고려태조와 조선태조의 설화를 간직한 환희담비와 삼청동비가 있다.
무량수전 맞은편에 바위 여러 개를 쌓아놓은 듯한 향로봉은 이곳을 쫒아서 성수산에서 내려오는 9개 지맥이 마치 여의주를 향하고 있는 구룡쟁주(九龍爭珠)의 형국이라 전국에서 기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몸통 하나에 아홉가지 있는 화백나무... 성수산 9룡의 기운과 관계있을까?
대웅전인 무량수전 앞마당에는 몸통은 하나인데 가지가 아홉인 커다란 나무하나가 있다. 아홉 가지의 의미는 성수산 구룡쟁주형(九龍爭珠形)과 무관하지 않다. 구룡쟁주형은 아홉 마리 용이 기운을 발하여 모여드는 형국이다.
수령 120년 된 화백나무 그늘 아래 앉아 나무의 기를 받는 것도 괜찮다. 요즘은 피톤치드를 내뿜는 화백나무가 인기가 높다고 한다. 화백나무 그늘에서 스님의 설법을 들어보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