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부터 남북 간의 적대행위가 중지된다. 지상·해상·공중에 걸쳐 전면 실시된다. 판문점 선언에 입각한 9·19 군사합의에 따른 조치다.
이로써 남북 간의 군사적 대결 상태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도로 올라가지 않도록 '막'을 꼭 붙들어야겠지만, 한반도를 만성적 위기로 몰아넣은 구도가 최종 단계에 거의 도달했다는 데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1953년에 한국전쟁이 멈춘 뒤에도 군사대결이 있었지만, 대결 국면이 본격화된 것은 1960년대다. 미국 외교협회가 2011년 11월 10일 발표한 <한국의 군사적 긴장 고조> 보고서에 따르면, 1955년부터 2010년까지 한반도에서 발생한 군사충돌은 총 1436건이다. 이 중에서 709건(49.4%)이 1960년대 후반에, 289건(20.1%)이 1960년대 전반에 발생했다. 1960년대 전 기간에 69.5%가 집중된 것이다. 남북 군사충돌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1950년대 후반의 발생 건수는 전체의 6.3%인 90회다. 1970년대 전반에는 153건으로 10.7%가 발생했다. 1960년대가 가장 많았을 뿐 아니라, 여타 시기들과 확연히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군사충돌이 2018년 11월 1일부터 종지부를 찍게 되는 것이다.
1960년대에 발생한 충돌 중에 대표적인 것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강원도 울진·삼척에 출현한 이른바 무장공비들로 인한 사건이다. 이때 시작된 군경과 무장공비의 전투가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간이나 이어졌다. 북한 병력 113명이 목숨을 잃고 7명이 생포됐다.
1960년대에 남북 군사충돌이 집중됐던 이유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나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미군과 남북한 3자 모두의 책임이지만, 1960년대의 군사충돌은 김일성의 전략이 낳은 결과라는 측면이 강했다. 1961년 9월 조선노동당 제4차 당대회 때 천명된 김일성의 '남조선 혁명론'에 따른 결과였던 측면이 컸다.
"남조선 혁명론은 '우리 조국의 통일과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하여서는 북반부의 사회주의 역량을 강화하는 동시에 남조선의 혁명 역량을 강화해야 하며,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하는 동시에 남조선에서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논리에 바탕했다." -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의 <북한의 역사 2>.
곧바로 남한을 통일하지 않고, 남한 내부의 혁명을 유도한 뒤 통일을 추진하자는 게 남조선 혁명론이었다.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한, 북한 정권 단독으로는 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에 입각한 것이었다. 북한이 표방했던 그 이전의 통일정책과 비교할 때 남조선혁명론이 갖는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정용욱 서울대 교수의 '북한 통일정책의 역사적 변천'에 정리된 한 대목이다.
"이전 단계 북의 통일 방안은 그것이 민주기지론이 되었든 국토완정론이 되었든 남북총선거안이 되었든 모두, 남(南)의 혁명과 통일이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제 위에 있었다. 즉 통일이 되면 남한 혁명이 이루어지고 남한 혁명이 완수되면 통일이 되는 것으로, 통일과 남한 혁명을 동시 과정으로 사고했다. 그러나 남조선 혁명론은 남한 혁명과 통일을 분리하였다." - 2009년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59권에 실린 논문.
'남한혁명이 먼저이고 통일은 그 다음'이라는 남조선혁명론은,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나고 1961년에 5·16 쿠데타가 발생한 데 대한 대응이었다.
'박정희 반공정권이라는 새로운 변수에 대응해야 한다', '4·19에서 표출된 남한 민중의 혁명 역량을 가벼이 볼 수 없다', '남한 민중이 4·19 혁명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한 것은 남한 내부에 혁명적 정치세력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등등의 인식을 토대로, 남한 내부에서 혁명 세력이 성장하고 이들이 정치적 역량을 갖도록 돕겠다는 판단 하에 나온 게 남조선혁명론이다.
조선혁명론에 입각해 북한이 벌인 것 중 하나가 소규모 군사대결들이다. 남한 내부의 혁명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주한미군과 박정희 정권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한 결과가 좀전에 설명한 미국 외교협회 보고서에 나타난 1960년대의 위기 고조다. 비무장지대(DMZ)나 남한 해안에서 군사충돌이 빈번해진 것은 그 때문이다.
"북은 남한 정권의 전복을 위한 혁명노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1964년 3월 창당된 남한의 지하정당인 통일혁명당을 지원했고, 직접 대규모 게릴라 부대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1960년대 후반의 남북관계는 심각한 대립 양상을 띠었다.
1966년에서 1968년 사이에 북한은 중대 병력 규모의 게릴라 부대까지 남한에 파견했으며, 미군과 한국군을 기습하여 심각한 피해를 입히곤 했다. 또 1968년 1월 북한군 특수부대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를 공격하였고, 1968년 10월 말 약 180명의 게릴라 부대가 남한에서 소요를 일으키기 위해 동해안에 상륙하였으나 그들의 임무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 위 논문.
베트남 전쟁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
그런데 1960년대에 북한이 대결 노선을 강화한 데는 남조선 혁명론 말고 또 하나의 결정적 동기가 작용했다. 베트남 전쟁이라는 요인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도울 목적으로 남한에 무장공비 등을 파견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1960년대에는 사회주의 진영의 단결력이 약했다. 1962년에 소련이 쿠바에 중거리 탄도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려다가 미국의 압력을 받고 철회한 일로 인해, 사회주의 진영에서 소련의 권위가 크게 떨어졌다. 1964년경부터는 중국이 광적인 문화대혁명에 빠졌다. 여기다가 소련·중국 양국이 1956년 이후로 이념분쟁까지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 전쟁이 전개됐기 때문에, 김일성은 북베트남에 대한 국제적 지원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3년에 <아세아연구> 제46권 제4호에 실린 조진구의 '중소대립, 베트남 전쟁과 북한의 남조선 혁명론, 1964~68'은 당시의 북한 지도부가 남조선혁명론과 베트남 전쟁을 상호 연동시켜 이해했다면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김일성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듬해(1966년) 10월 열린 제2차 당 대표자회에서 김일성은 자주노선을 재천명함과 동시에, 베트남 문제와 관련하여 사회주의 진영이 단결하여 북베트남을 돕자고 제안하고 북한도 여기에 참가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북베트남을 돕는 방법 중 하나는 남한의 남베트남 지원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한국이 비전투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한 이후 북한은 베트남 전쟁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특히 두 번째 전투부대를 파병했던 1966년 가을부터 북한은 무장 게릴라를 한국으로 침투시키는 등 대남 공세를 강화"했다고 위 논문은 말한다. 북한이 무장공비 파견을 베트남 전쟁과 연관시켰다는 보다 직접적인 언급은 이종석의 <북한의 역사 2>에 나온다.
"북한은 남한혁명을 지원하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견제하여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을 돕는다는 이중의 내면적 목적으로 남한에 대한 수 차례의 고강도 군사적 도발도 서슴지 않았다. 1968년에 발생한 북한 무장게릴라 부대의 '청와대 기습 사건'이나 '울진·삼척 지구 침투 사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남한의 관심을 남북 대결로 돌려 남베트남에 대한 남한의 군사적 지원을 줄이려는 의도로, 북한이 1960년대 후반에 군사대결의 강도를 높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조선 혁명론은 실패했다. 북한은 1970년대 초반에 대화 국면으로 선회했다. 세계적인 데탕트(탈냉전) 분위기도 북한의 정책 전환을 유도했다. 이로 인해 1960년대 후반에 절정에 달했던 남북 군사대결이 1970년대 전반에는 급감하게 됐다.
그때부터 남북 군사대결은 153건(1970년대 전반), 54건(1970년대 후반), 26건(1980년대 전반), 10건(1980년대 후반)으로 계속 감소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 소폭 상승하는 추세를 보였다. 1990년대 전반과 후반에 각각 22건 발생한 데 이어 2001~2005년에 37건으로 늘었다가 2005~2010년에는 26건으로 약간 줄었다.
남북 군사충돌은 남조선 혁명을 유도함과 더불어 북베트남을 돕겠다는 북한의 전략으로 인해 1960년대에 급증했다. 그 뒤 계속 명맥을 이어오던 남북 군사충돌이 평양선언과 남북군사합의를 계기로 11월 1일부터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