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나를 붙잡은 말들'은 프리랜스 아나운서 임희정씨가 쓰는 '노동으로 나를 길러내신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
나는 부모님과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의 엄마와 아빠는 문자를 쓸 줄 모르신다.
지인들은 부모님께 문자 입력하는 법을 알려드리라고 말한다. 시도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폴더폰을 쓰실 때는 문자별 번호를 종이에 써서 보고 누르시라 드렸고, 스마트폰으로 바꾼 뒤로는 터치해야 하는 순서를 여러 번 보여드리며 설명해 드렸다.
하지만 나의 부모가 휴대전화로 문자를 쓰는 일은 어린아이가 한글을 떼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자음과 모음을 외우는 일이 낫지, 터치하고 글자를 읽고 눈으로 잘 들여다보기란 참으로 번거롭고 더딘 일이었다.
아빠는 일흔이 넘었고 엄마는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 일흔은 무언가를 새로 배우거나 익히거나 이해하려면 적어도 열 살 때보다 일곱 배 이상의 애씀이 필요한 나이 같다.
사실 나이보다 한글 자체에 익숙지 않은 게 더 큰 어려움이었다. 보고 읽는 데 시간이 꽤 걸리고, 특히나 써야 할 때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잘 안 보여 포기하고, 몇 글자를 읽다가 포기하신다. 쓰는 건 엄두도 내지 않으신다.
게다가 뭉툭하고 굳은살이 잔뜩 박인 아빠의 손가락으로는 문자를 하나하나 터치하기가 쉽지 않다. 스마트폰을 사 드려도 그저 전화를 걸고 받는 것 외에는 잘 쓰질 못하신다. 엄마 아빠에게 전화기는 영원히 아날로그다.
다섯 번 쯤 시도했을까. 포기는 나보다 부모님이 빨랐다. 나도 자연스럽게 부모님과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은 없겠다 단념했다.
'연락 바랍니다'를 '딸아 보고 싶다'로 읽는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였다. 엄마 번호로 갑자기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분명 문자 메시지인데, 발신자가 '엄마'라고 화면에 떴다. 깜짝 놀라 들여다봤다.
'ㅇㅇㄹㅈ'
몇 초 후 한 개의 메시지가 더 온다.
'ㅏㅐㄷ치ㅁ'
문자를 쓸 줄 모르는 엄마의 메시지. 엄마가 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음과 모음이 제멋대로 흐트러져 있는 그 문자 속에서 나는 엄마의 마음을 읽는다.
'딸 일 잘하고 있어? 엄마는 좀 무료해. 오늘도 김치 하나 놓고 혼자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어. 저녁에 아빠 고기 좀 먹이려고 삼겹살 사 왔어. 네 아빠 고기라면 사죽을 못 쓰잖아. 힘들게 일하는데 좋아하는 고기라도 구워줘야지. 우리 딸 바쁘지? 바쁘게 일하고 있는 거 알아서 전화하고 싶은데 그냥 참아. 수고해라.'
이 긴 말을 문자로 쓰지 못해 그저 딸의 이름이 적힌 전화번호부를 보고 아무거나 눌러보는 엄마. 엄마는 메시지가 간 줄도 모르고 그저 애꿎은 스마트폰만 계속 만지작만지작한다.
가끔 아빠에게도 문자 메시지가 온다.
'연락 바랍니다.'
'연락 바랍니다.'
뭉툭한 손가락으로 이상하게 자꾸 저 문구를 반복해 누르는 아빠. 나는 '연락 바랍니다'라는 여섯 글자를 '딸아 보고 싶다'로 읽는다. 부모님은 딸을 향한 생각을 멈추는 법이 없어서 잠이 안 올 때, 삶이 무료할 때, 일이 없을 때 등 시도 때도 없이 정체 모를 문자들을 내게 보낸다. 스마트폰 액정을 들여다 보고 손가락으로 아무거나 눌러보며 딸의 마음을 콕콕 터치한다. 그 문자를 보고 있으면 눈물이 콸콸 쏟아진다.
나는 가끔 엄마 아빠에게 답장을 보낸다.
'엄마 사랑해요.'
'아빠 건강하세요.'
부모님은 문자 메시지가 온 줄도 잘 모르시고 확인할 줄도 모르신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부모님께 메시지를 쓰곤 한다. 문자로 이야기를 나누고 연락을 주고받는 것은 내가 단념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엄마와 아빠는 잘못 누르는 문자로 딸에게 마음을 보낸다. 시간이 걸리고, 읽을 수 없기도 하고, 반복해 보내기도 하지만 엄마와 아빠가 나에게 보내는 문자. 그리고 그 문자에 내가 답하는 마음. 그것이 내가 일흔의 부모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유일한 방법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www.brunch.co.kr/hjl0520)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