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연합은 1998년부터 봄이 되면 도보순례를 떠납니다. 활동가들은 무쌍한 자연과 또 인간이 낸 생채기들을 현장에서 만납니다. 2019년 스물 두 번째 녹색순례는 '기후변화를 걷다'입니다. 화력발전소와 핵발전소를 둘러 재생에너지와 그 재생에너지를 일구고 사는 사람들의 궤적을 좇습니다. 기후변화와 미세먼지는 당장의 편리가 결국 치명적인 불리로 돌아온 증거입니다. 에너지 전환은 이제 절체절명의 사명입니다. 8박9일(5월9일부터 5월17일까지) 동안 녹색연합 활동가들이 보고, 듣고, 내디딘 단편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기자말]
넷째 날 아침, 줄포만을 뒤에 두고 나선다. 너른 갯벌 새만금을 기어이 내팽개치고 우리는 줄포만 갯벌만을 남겼으니 헛헛하기만 하다. 발걸음 내디딜 때마다 기어코 버리고 또 지나친 것들뿐이다.
순례단이 발걸음을 준비할 동안 지원팀은 8박 9일의 무게를 트럭에 싣는다. 오늘은 동백꽃이 지고 여름을 준비하는 선운산을 휘돌아 동호항에 이르는 여정이다. 선운산을 지척에 두고부터 맘은 진즉에 최영미가 말한 선운사에 가 있다.
선운사에서
- 최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터벅터벅 걸음은 어제와 같은지 세파의 곤궁함은 기어코 나른함이 된 것은 아닌지 신발 끈 동여매듯 챙겨본다. 파헤쳐질 산과 물길 막힌 강과 핏기없는 자본과 그래서 그곳을 걷고 있는 우리는 곤궁하다. 하지만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듯 우린 벌써 나른한 것이 아닐까. 순례는 곤궁함이 더이상 나른함이 아닌 분투가 되어가는 여정이다.
오늘은 30km다. 순례단이 걷는 동안 지원팀은 다시 이어질 하루를 준비한다. 숙소를 확인하고, 저녁 찬거리를 다듬고 그렇게 순례단의 하루를 여닫는다.
동호항에선 위도가 내다보인다. 전라북도 섬 중 가장 넓은 곳, 뻑적지근한 조기 파시로 옛 영화를 품은 곳, 계유정난에 살아남은 김종서의 유일한 혈육 하나가 숨어 살던 곳 그 위도를 바라보며 걸음을 멈춘다. 위도와 육지 사이의 바다를 '칠산어장'이라 부른다. 위도의 조기 파시가 유명한 것은 이 칠산어장이 조기를 가득 담고 있어서였다. 조기를 소금에 절여 말린 굴비, 그 굴비 중 으뜸으로 치는 '영광 굴비'가 여기서 난다. 과거 위도는 행정구역상 영광군에 속했다. '파시'가 진 위도의 위세는 한풀 꺾였지만, 지금도 격포항서 출발하는 여객선은 제법 붐빈다.
오후 6시가 되어서 동호항에 이른 순례단을 맞았다. 차라면 시속 60km로 30분 내달렸을 길을 순례단은 발바닥 물집을 피우며 종일토록 걸었다. 오후 7시 20분, 동호항서 해지는 시간이다. 낙조는 어김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우리 여정도 지는 해와 같지는 않을까. 순례를 시작한 이래 화력발전소와 핵발전소 그리고 남김없이 묻어버린 갯벌을 두고 떨치지 못하는 단상이다. 행여 지금 인류가 향하는 것이 낙조와 닮지는 않았을까 하는.
꽃이 지고 해가 지는 길을 순례단은 오늘도 마다치 않고 내디뎠다. 산, 강, 하늘 그리고 사람 모두가 위태로운 세상에서 순례단의 발걸음은 오늘도 거침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