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 대체 : 13일 오후 7시 48분 ]
차기 국무총리 인선을 놓고 여론이 분분하다. 구체적으로는 정세균 카드에 대한 트집 잡기다. 이들은 민주주의 기본 원리인 삼권분립을 희화화한다고 주장한다. 국가 의전 서열도 문제 삼고 있다. 국회의장은 2위, 국무총리는 5위다. 그래서 격이 맞지 않다고 한다. 일부 보수언론과 야당 정치인들이 중심에 있다. 입법부 수장이 행정부 수장 지휘를 받는 게 민주주의 원리에 어긋나는 일일까. 또 의전서열을 뒤로 물려 헌신하는 게 국회 권위를 훼손하는 것일까. 동의하기 어렵다. 하나씩 따져보자.
노무현 대통령은 군수를 지낸 김두관을 행정자치부장관으로 끌어올렸다. 또 강금실은 법무부장관으로 발탁했다. 당시 검찰총장보다 어리고 연수원 기수도 낮았지만 파격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김현웅 법무부장관, 이완구 총리, 황교안 총리를 발탁했다. 이들도 연수원 기수를 뛰어넘고 선배 정치인을 제치고 2인자 자리에 올랐다. 우리사회에서 서열 파괴는 긍정적 의미로 쓰인다. 직급을 뛰어넘은 능력 위주 발탁 인사를 뜻한다. 앞서 예로 삼은 이들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했는지 평가는 다를 수 있다. 분명한 점은 경직된 관료 조직에 긴장감과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렇다면 아래로부터 서열 파괴만 박수 받을 일일까. 아소 다로는 10년 전 제92대 일본 총리를 지냈다. 지금은 후배 정치인 아베 밑에서 재무상을 맡아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다. 얼마 전 원내대표로 선출된 한국당 심재철 의원은 5선 국회부의장 출신이다. 추미애 의원 또한 5선에다 당 대표를 지냈지만 법무부장관을 수락했다. 박보영 대법관은 향판으로 내려갔다. 낮은 데로 내려간다는 점에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할 일이다. 물론 전제 조건이 있다. 자리를 탐한다면 추하다. 하지만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라면 감사하고 격려하는 게 합당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세균 카드를 꺼낸 이유는 다름 아니다. 경제 문제를 극복할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이 처한 현실을 감안한 삼고초려다. 정세균 의원은 실물경제에 능하다. 그는 대기업 상무이사로서 해외에 주재하며 수출 전선에 선 경험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를 인재로 영입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는 산업자원부 장관으로서 경제정책을 집행했다. 무엇보다 정세균은 여야를 넘나드는 화합형 정치인이다. 야당을 포용해 후반기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우리 경제는 고도성장을 지나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수출은 11개월째 뒷걸음 치고 있다. 실업률도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은 절망감을 호소하고 있다. 경제정책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다. 문재인 정부는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는 포용경제를 지향한다. 소득주도성장이 핵심이다. 정세균 의원이 말하는 '분수경제론'도 맥을 같이한다. 그는 <99%를 위한 분수경제>라는 책에서 "서민과 중산층, 중소기업 등 경제 하층부에 실질적인 혜택을 주어 효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라 경제 전체로 퍼져가게 해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 철학과 정책 기조를 이어가면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대목이다. 산자부 전윤종 국장은 "지금도 역대 최고 장관으로 회자된다. 정치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최고 부처로 이끌었다. 그때는 산업현장에 활기가 돌았고 관료들도 일하는 게 신명났다"고 회고했다. 정 장관은 회의실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 호를 붙였다. 반계 유형원, 연암 박지원, 다산 정약용, 담헌 홍대용 등이다. 관료들에게 현장을 생각하라는 넛지였다. 세종시로 옮겨가면서 지금은 없어졌다고 한다.
황희는 조선시대 최고 명재상이다. 그를 영의정으로 발탁한 왕은 세종이다. 황희는 세종과 대척점에 있던 양녕대군을 지지했다. 그러나 정치적 입장을 떠나 세종은 발탁했고, 황희는 수락했다. 그 결과 조선 500년 동안 가장 꽃피웠던 시절은 세종대였다. 정세균은 흔히 말하는 친문이 아니다. 국회의장 재직 당시 일화다. 당시 여론은 최순실 특검법 연장을 압도적으로 요구했다. 정 의장은 직권상정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국가비상사태가 아니라는 이유다. 여론에 올라타 환호를 즐길 수 있지만 원칙을 지켰다. 지지층은 서운했지만 그릇된 선례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니 삼권분립을 운운하며 민주주의 훼손을 우려하는 것은 기우다.
일본 메이지유신을 이끈 동력 가운데 하나는 교육이다. 글방을 뜻하는 '주쿠(塾)'가 중심에 있다. 일본 우익들은 요시다쇼인(吉田松陰)을 정신적 지주로 받든다. 그는 고향에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열었다. 여덟 장 다다미 방에서 공부한 제자들은 훗날 막부를 뒤엎고 일본 근대화를 주도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도 '마쓰시타 정경숙(政經塾)'을 설립했다. 이곳 출신들은 일본 정계와 재계를 이끌고 있다. 엊그제 영면한 김우중 회장은 비록 대우는 도산했지만 품위 있는 경제 원로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74세에 '글로벌 청년사업가' 과정을 만들었다. 이곳을 졸업한 산업연수생 1000여명은 지금 동남아에서 세계경영에 나서고 있다.
정세균은 의장 퇴임후 '정세균 정치학교'를 열었다. 평소 의장을 그만두면 품격 있는 정치 발전과 좋은 후배 정치인을 기르는데 헌신하고 싶다고 했던 그다. 모두가 정치세력화에 골몰할 때 그는 조용한 가운데 품격 있는 정치발전을 실천에 옮겼다. 올해 1기 20여명이 나왔다. 만일 총리를 수락한다면 자리보다는 역할에 부응한 고민의 결과로 이해된다.
모 언론은 정세균 카드에 대해 '부끄러움을 잃은 나라'라고 공격했다. 그동안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을 줄곧 공격해온 그들이다. 그럼에도 경제통 정세균 카드를 비난하니 논리가 맞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잃은' 사람들은 정작 그들이 아닌지. 4차 산업혁명이란 격랑 앞에서 언제까지 의전서열과 격식만 따질 것인지. 그들의 상황 인식이 참으로 한가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임병식씨는 전북대학교 초빙교수(전 국회 부대변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