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기본소득 시대'가 코로나19로 인해 열리는 듯하다. 지구촌 전체가 비상사태에 처하자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기본소득 형태와 흡사한 방식의 '긴급지원'을 실시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긴급재난지원금을 준비하고 있고, 각 지자체에서도 여러 형태로 어려움에 처한 서민들을 위한 재난지원을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내수 경기가 급속하게 위축돼 소상공인·영세자영업자들이 줄줄이 폐업 위기에 몰리고, 실업자가 양산될 가능성이 커지자 국민들의 기본소득에 대한 인식도 자연스레 높아지고 있다. 때마침 기본소득 실현을 위해 뛰는 기본소득당 용혜인 대표가 국회 입성한 것도 상징적 의미가 있다. 기본소득이야말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와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한 증표이리라.
일각에서 긴급재난지원금을 재난기본소득으로 부르는 것과 관련해 정명(正名)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인권 복지 발전사를 보면 장벽을 깨고 새 역사를 여는 데 있어 정공법이 아닌 우회로를 통해 성사되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긴급재난지원금의 형태로 지급되지만, 그것이 본격적인 기본소득시대를 여는 단초가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지금 새 역사가 펼쳐지는 시점에 살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기본소득 아닌 '기본임금'이라고 한 까닭
프란치스코 교황이 '세계 각국 사회운동단체 대표들에게 보내는 부활절 편지'를 통해 기본소득 도입을 호소한 것은 기본소득시대 흐름에 확 불을 당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교황은 "정작 세계화의 풍요를 맛보지 못했던 이들이 코로나19 사태에선 2배로 가혹한 타격을 받고 있다"라면서 "지금이야말로 보편적 기본소득을 고려할 시점이며, 이는 권리가 배제된 노동자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매우 인간적이면서도 기독교적인 이상을 한꺼번에 실현시키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교황은 기본소득이 시급한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냈다. "가정주부, 병자, 노인, 소작농, 노점상, 재활용업자, 이벤트 종사자, 건설노동자, 의류업 종사자, 돌봄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모두가 자본주의 시장경제 그 언저리에 머물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황이 발표한 부활절 메시지 원문을 보면 '기본소득'(basic income) 대신 '기본임금'(basic wag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성경에 보면 한 데나리온 이야기(마태 20,1~16)가 나온다. 포도밭 주인이 일꾼들을 사서 일을 시키는데, 이른 아침,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에 각각 부른 일꾼들에게 품삯으로 모두 한 데나리온씩만 주자 먼저 일했던 일꾼들이 항의했다는 이야기다.
기본임금의 근거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교황이 굳이 기본임금이라 한 것은 기본소득은 불로소득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권리로 받는 당당한 대가임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교황에게 기본임금이 곧 기본소득임은 앞에서 언급한 이들 중 이반 일리히(Ivan Illich)가 '그림자 노동자'(shadow worker)라 칭한 가정주부를 비롯해 노인·소작농·노점상·영세자영업자 같은 비임금노동자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본소득, 장애인을 삶의 현장으로 투신하게 할 시드머니
아마 15년 전이었을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정당'에서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던 시절, 나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장애인과 같은 이들이 우리 사회에는 많은데 진보정당의 캐치 프레이즈가 어찌 이러한가' 항의했었다.
임금노동만 노동일까 교황이 언급한 그들은 다른 형태의 노동으로 사회에 이바지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 장애인계에선 장애인의 무노동권(the right to not work)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노동생산성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물론 여기에서의 노동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공장제 임금노동을 말한다.
노동의 의미를 새로운 관점에서 통찰함으로써, 공장제 임금노동으로만이 인간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며 생산성을 한 개인의 가치와 등치시키는 자본주의 체제가 주입시킨 고정관념을 전복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동화로 대량 실업사태를 낳을 가능성 높은 제4차 산업혁명시대에 '9 to 5'(나인 투 파이브)식의 임금노동시장이 줄어들 것은 명확하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장애인들이 고유한 특성을 살리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다양한 노동 영역들이 속속 창출되고 있다. 장애인들에게는 문화 예술행위처럼 노동생산성과 무관하게 자아실현의 한마당이 될 탈노동 유토피아까지 그려지고 있다.
노동사회가 일하기 위해 사는 사회였다면, 탈노동 유토피아는 살기 위해 일하는 사회다. 기본소득은 장애인을 비롯한 임금노동 현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삶의 현장으로 투신하도록 촉진하는 아주 유효한 시드머니가 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기본소득은 사회적 면역력 향상시키는 촉진제
인류는 지금 '대위기'(The Great Emergency) 시대를 지나가고 있다. 다시 교황의 메시지다.
"이 폭풍우도 결국 지나가겠지만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의 삶에 대해선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번 사태가 인본주의적이고 생태학적인 전환을 통해 돈에 대한 숭배를 끝내고, 생명과 존엄을 중심에 놓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중략) 국가주의든 시장주의든 정부의 기술관료 패러다임이 이번 위기에 대응하는 데 있어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을 각국 정부가 솔직히 인정하고, 사람을 중심에 놓고 공동체 전체가 함께 치유하고 보호하고 나눠야 한다."
교황의 주문처럼 코로나19 사태는 지구상 어느 국가보다 양극화 현상이 심각한 우리 사회가 재구조화에 나서길 촉구하고 있다. 국가방역체계 확립을 비롯해 공공의료 시스템 강화 같은 단기적인 대책과 더불어 장기적인 예방 차원에서 장애인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취약계층을 보듬으며 사회적 면역력을 꾸준히 증강해야 할 것이다.
다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양 희망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의 첫 집단 희생자가 청도대남병원 정신장애인들이었듯이, 팬데믹 이후 역시 힘없는 자들을 더욱 힘없게 만들고, 아픈 사람들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소외된 자들을 더욱 소외시키는, 다시 말해 가진 자는 우대하고 가난한 자는 홀대하는 부우빈홀(富優貧忽)의 사회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가 '악마의 맷돌'이라 칭한 대로 서민들의 삶을 옥죄는 비인간적이고 반공동체적인 장치들이 산재하는 사회 말이다.
빈익빈부익부의 구조악과 싸우며 공동체 회복을 통해 사회적 면역력을 강화시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도전이다. 거기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으로 일용할 양식 같은 한 데나리온의 품삯(마태 20,10)인 '기본소득'은 그러한 사회를 향한 촉진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