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에게 일생일대의 트라우마는 친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임이었다. 해서 임금이 되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 일환으로 양주 매봉산 기슭의 무덤을 수원 화산 현충원으로 이장하면서 사도세자의 복권과 추존을 시도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던 정조는 해마다 기일이 되면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였는데, 수원 화성으로 이장하게 되면 오가는 뱃길이 문제였다. 어가를 싣고 수종하는 신하ㆍ장졸이 수백 명에 이른다. 보통 행렬이 아닌 것이다. 정조는 정약용이 수학적 계산과 원리에 밝다는 사실을 알고 이 역사를 아직 젊은 그에게 맡겼다.
정조는 정약용이 대과에 급제하던 재위 13년(1789)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장헌세자) 묘를 화성의 화산으로 옮겼다. 왕릉에 버금가는 위격을 갖추어 놓고 자주 화성으로 행차했는데, 그때마다 배다리가 필요했다. 정조는 이를 전담하는 주교사(舟橋司)를 만들었다.
주교사의 도제조 3명이 영의정ㆍ좌의정ㆍ우의정일 정도로 그 중요성은 컸는데, 정조는 막상 주교의 설계는 갓 급제한 정약용에게 시킨 것이었다. 정조는 정약용이 서학서를 통해 서양 과학지식을 습득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약용을 주교 설계의 적격자라고 여겼던 것이다.
실제로 배다리 축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약용은 훈련도감 대변선과 경강사선 중 선체가 큰 대형선 80여 척을 징발하고 그 위에 판자를 놓아 다리를 만들어야 했다. 상업선인 경강사선에는 그 대신 대동미를 운반하는 특권을 주었으므로 징발당한다고 불평하지는 않았다. (주석 4)
정약용의 배다리 설치는 성공이었다. 벼슬에 나가던 첫 해에 일궈낸 성과이다. 그것도 유학자 선비가 해낸 일이었다. 정조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지고 조정에서는 정파를 떠나 그의 역량을 우러르게 되었다. 그는 「과주교(過舟橋)」란 시를 지어 심경의 일단을 밝힌다.
해마다 정월이 오면
임금님 수레가 화성으로 거동하시네
가을 지나자 배를 모아 들여서
눈 내리기 전에 배다리를 이루었노라
새 날개 펼치듯 붉은 난간 두 줄로 뻗고
고기비늘처럼 흰 널판자 가로로 깔렸네
선창가 저 바위는 구르지 않으리니
천 년토록 임금님의 마음을 알리라.
정조는 정부의 많은 예산과 수많은 백성의 노역을 동원하지 않고서도 빠른 기간에 안전하게 설치한 배다리 공사에 크게 만족하였다.
"배다리는 단순히 임금이 한강을 건너는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정조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가슴 맺힌 한을 풀기 위해 눈물을 삼키며 가는 길이었다." (주석 5)
정약용은 이 때에 사도세자를 위해 만사를 지었다. 「현능원 개장 만사」란 제목이다.
임오년 5월달 돌아가시기 전에
날마다 부지런히 사연을 여셨지
아침에 올린 글에 모두 답을 내렸고
밤에는 외로운 베갯머리 슬픔 머금었네
바다같이 넓은 도량 뉘라서 헤이릴고
천둥같은 노여움 참지 못했네.
주석
4> 이덕일, 앞의 책, 83쪽.
5> 금장태,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7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