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폭력·성폭력 문제는 그 심각성에 비해 우리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2019년 심석희 선수의 성폭력 피해 폭로, 올해 최숙현 선수의 죽음을 거치며 스포츠 폭력·성폭력 문제가 우리 사회의 화두로 떠올랐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20년 동안의 스포츠 폭력·성폭력 판결문 163건을 입수해 분석했다. 판결문에 담긴 사건의 심각성·특수성, 법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른 양형사유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이 기사는 그 네번째다.[편집자말] |
"우린 운동할 테니, 너넨 나가라."
2016년 가을 광주의 모 고등학교 배구부 선수 3명이 팀 코치에게 당한 성추행 피해 사실을 고발한 후 받은 메시지 내용이다. 어렵사리 피해 사실을 고발한 선수들에게 돌아온 것은 부원들의 질책과 따돌림, 그리고 피해 사실을 알고 있는 주변인들의 침묵이었다.
결국 내쫓긴 것은 거짓말쟁이로 내몰린 피해자들이었다. 2명의 피해자는 따돌림으로 인해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갔고, 다른 한 명은 배구 선수의 꿈을 접었다. 학교와 학부모, 배구부원들은 배구부의 존속을 위해 성추행 피해 사실을 은폐했다.
거짓말쟁이가 된 피해자들
물론 처음부터 모두가 성추행 사건에 등 돌렸던 것은 아니었다. 2016년 9월 7일, 성추행 피해 사실이 내부에 알려지자 배구부원들은 감독에게 이 사실을 공론화해 줄 것을 요청했다. 피해자들 외에 일부 다른 배구부원들도 각자의 성추행 피해 사실을 진술서에 기재하기도 했다.
하지만 배구부원들은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돌연 태도를 바꿨다. 본인들이 전날 작성한 진술서를 파쇄할 것을 요구했다. 입장을 바꾸게 된 배경에는 배구부 감독과 학부모들의 입김이 있었다. 먼저 배구부 감독은 성추행 사실이 알려진 직후, 선수들에게 "성추행 사실이 공론화될 경우 배구부가 해체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당시 이 말을 들은 배구부원 선배는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피해자에게 전했다.
"(배구부) 해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냥 돌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어. 언니는 가족들이 나만 바라보고 있어. 내가 노력을 해서라도 프로를 가야만 해... 미안해. 언니가 네 편이 안 돼 줘서. 언니가 진로에 눈이 멀어 너의 입장도 무시하고..."
배구부원의 학부모들도 사건 은폐에 한몫 했다. 배구부 감독은 경찰 수사 과정에서 "피해사실을 신고한 3명 이외에 5명의 학생도 추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모님들과 전화 통화를 한 뒤 마음을 바꾼 것 같다"고 진술했다. 추후 이 사건의 법정 증인으로 나온 배구부 관계자도 "학부모들은 이 사건이 알려지면 진학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 사건을 덮자는 분위기였다"고 진술했다.
학부모들은 성추행 피해 사실을 두고 피해자들 앞에서 갑론을박 하기도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한 피해자는 끝내 "다 내 잘못이라고 하니까, 그냥 내가 나간다"라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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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를 제외한 배구부 관계자들이 성추행 피해 사실을 은폐한 주된 이유는 '진로' 문제 때문이었다. 성추행 사실이 공론화되면 배구팀이 해체되거나 본인들의 진학에 영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피해 선수들은 성추행 피해에 대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배구부마저 떠나야 했다.
은폐 행위 두고 "비인간적"이라 비판한 1심 재판부, 하지만...
위 사건을 맡았던 광주지방법원 1심 재판부(재판장 강영훈)는 사건을 은폐하려 한 일련의 정황들을 두고 "비인간적이고 비교육적인 처사"라며 강하게 지적했다. 1심은 배구부 코치라는 지위를 이용해 학생들을 강제 추행한 피고인의 혐의와 함께,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시도했던 일련의 정황들도 주요하게 양형 요소로 고려했다.
무엇보다 피고인과 학교 측은 배구부원들에게 이 사건이 공론화될 경우 배구부가 해체될 수도 있음을 내비쳐 사실상 종전 입장을 바꾸게 강요하고,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일부 학부모들도 피고인과 학교 측의 입장에 동조하는 한편, 나아가 피해자들을 질책까지 했다.
1심은 징역 2년 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1심 판결은 광주고등법원 2심 재판부(재판장 노경필)에서 파기된다. 2심 재판부가 피고인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 형을 내린 것이다. 앞서 1심 판결문에서 언급된 피해 사실은 그대로 인정됐다. 하지만 2심에 앞서 피해자 일부와 합의가 된 점, 피고인의 가족과 동료가 선처를 계속 탄원하고 있는 점 등이 새로운 양형요소로 고려되어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이를 두고 김은희 테니스 코치는 "체육계에서 가해자의 비리를 덮어주려는 사람은 있어도, 피해자 편에서 싸워줄 사람은 없다"고 지적했다. 김 코치도 초등학교 때 본인을 상습 성폭행했던 테니스 코치를 15년 만에 법정에 세워 유죄 판결을 끌어낸 경험이 있다.
김 코치는 "스포츠계의 폐쇄성 때문에 피해자도, 그의 편에서 증언을 하는 사람도, 모두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다"라며 "선수들의 기량 평가가 대체로 감독들의 주관적 평가로 이뤄지는데, 이 때문에 피해자의 편을 들면 향후 출전 과정에서도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동반된다"고 말했다.
"가해자 비리 덮으려는 사람은 있어도, 피해자 편 들어줄 사람은 없다"
성범죄 사건 전문 이은의 변호사도 같은 문제의식을 전했다. 이 변호사는 과거 신유용 전 유도선수의 사건을 변호한 바 있다. 신씨가 고등학생 시절 유도부 코치로부터 수차례 당했던 성폭행 피해 사실을 8년이 흐른 지난 2019년 1월 실명으로 고발했던 사건이다. 가해 코치는 지난 2월 항소심에서 징역 6년 5개월을 선고받았다.
이 변호사는 "체육계 피해자들은 직업, 경제, 사회적 관계 모든 걸 내려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감수하고서 고발을 한다"면서 "그렇다 보니 피해자들은 사건이 발생한 지 한참 지난 후에야 고발하기도 한다. 사법부는 이러한 점을 고려해 체육계에서 피해사실을 고발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피해 양상은 <오마이뉴스>가 분석한 163건의 스포츠 성폭력·폭력 판결문에서도 다수 확인된다. ▲쇼트트랙 실업팀 감독이 계약직 위치에 있었던 피해 선수들의 트레이닝복 하의를 끌어내리는 등의 성추행을 잇따라 했음에도 추후 재계약에 영향을 미칠까봐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던 사건 ▲태권도 선수가 목표였다는 이유 탓에 태권도 관장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성추행 내지 간음을 당해왔던 피해 학생들이 태권도장을 그만두지 못하고 피해 사실을 숨겨온 사건 등이 그렇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2019년 10월 인권위에 제출한 '스포츠 분야 성폭력/폭력 사건 판례 분석 및 구제방안 연구' 용역보고서에서 "폭력·성폭력 발생 시 가해자 조치 및 피해자 보호는 일차적으로 대한체육회와 회원종목단체가 대응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있다"면서 "피해자가 2차 피해의 두려움 없이 피해를 드러내고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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