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엄마의 초상화>를 소개해주셨다. 어디쯤이었을까, '익숙한 엄마의 모습 속에는 낯선 미영씨도 살고 있어요'부터 였을까, '엄마는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집이지만 미영씨는 집이 아니고 싶을 때도 있을 테니까요'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의 두 가지 얼굴
'엄마를 이해하고 싶었'다던 유지연 작가가 그린 첫 번째 그림책 <엄마의 초상화>는 양쪽으로 다른 엄마의 모습이 이어진다. 왼쪽 면이 딸에게 보이는 엄마의 모습이라면, 오른쪽은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미영'씨의 이야기이다. 생선 머리만 먹고 TV를 벗 삼아 지내는 지루한 일상의 엄마와 달리 미영씨는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다.
왼쪽 면의 엄마는 '엄마'라는 페르소나('가면'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로 심리학적으로는 타인에게 파악되는 자아 또는 자아가 사회적 지위나 가치관에 의해 타인에게 투사된 성격을 의미한다)로 살아왔던 나날이다. 하지만 파마 머리로 성긴 세월을 감추어야 하는 나이가 될 즈음이 되면 엄마라는 페르소나가 효용 가치가 떨어진다.
엄마로 살고 싶어도 훌쩍 커버린 아이들은 '엄마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요'라며 엄마를 밀치기 시작한다. 아마도 <엄마의 초상화>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린 건 아이들이 떠나간 '엄마'라는 페르소나가 무용해지는 시절을 절감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아이들만 다 자라면'이라는 목표로 살아왔던 나 역시 본의 아니게 올해 '나'를 위해 살아가야 할 시절에 던져졌다. 많은 엄마들이 나처럼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라서도 여전히 아이들 주변을 맴돌거나, 아이들이 떠나간 '빈 둥지'에서 박탈감을 주체하지 못해 헤맬 것이다.
우리나라처럼 가족적 정서가 강한 환경에서는 아이들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도 손자들을 돌보며 엄마의 페르소나를 연장하며 살 여지도 크다. 하지만 제아무리 주변을 맴돌고 손자를 키워도 다 자란 자식이 내 품 안의 자식과 같을까.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남는다. 과제는 '나'이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키우며 늘 '우리'로만 살아오는 게 익숙했던 엄마에게 '나'를 중심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은 낯설고 생경하다.
빨간 립스틱만큼의 열정과 교회 첨탑보다 높은 자존감이 있어도, 막상 '엄마'라는 공동체 속의 안온했던 위치를 벗어나 '나' 미영씨로 첫발을 내딛는 게 쉬울까. <엄마의 초상화>는 그런 엄마의 도전을 씩씩하게 그려낸다. 성긴 파마로 가렸던 머리에 멋쟁이 모자를 씌우고 딸이 그려준 늙수그레한 초상화 대신 자신의 맘에 드는 초상화를 그려줄 그곳을 향해 '탐험'을 떠난다.
72살, 시작하기 좋은 나이
꼭 어디를 향해 떠나는 것만이 '탐험'은 아니다. 72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수백 점의 그림을 남긴 이도 있다. 독일의 화가 엠마 스턴의 실화를 담은 <엠마>다.
자식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고양이와 홀로 살던 엠마 할머니, 자식들이 선물한 고향 마을 그림이 할머니가 기억하는 추억 속 고향을 담아내지 못함을 아쉬워하다 직접 붓을 들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없어 자식들이 없을 때만 그림을 벽에 걸었지만, 그 그림을 본 아이들이 칭찬을 하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림책에 담긴 눈 쌓인 마을, 딱따구리, 고양이 등은 화가 엠마 스턴이 그린 그림들이다. 엠마 스턴 할머니는 그림을 그리고 나서 이제 더는 외롭지 않았다.
이제 이 나이에 또 무엇을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을 때 그림책 심리 수업을 시작했다. 그걸 지금 시작해서 뭘 하려고 하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그냥 해보고 싶었다고 말하면서도 계면쩍었다. 뭘 계획하기에 늦은 나이, 내 자신에게 돈을 들여 무엇을 배운다는 게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래전부터 심리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배우는 게 곧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어야 하던 시절에는 그게 과욕이었다. 그러다 그만 뭘 배워 써먹기에 늦은 나이가 돼버렸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이제 '나'를 위해 살아야 시절에 던져졌다.
그 새롭게 시작하는 '나'의 시간, <엄마의 초상화> 속 엄마가 여행을 떠나듯 나도 무작정 나를 향한 여행에 첫 발을 '그림책'으로 내디뎠다. 아이들과 도서관을 다니던 시절, 아이들보다 내가 더 좋아했던 그림책,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했던 것과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해보게 되는 시절, 낯선 행복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