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는 건 한 인간을 읽는 것이다. 글쓴이가 삶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지를 읽는 것이다. 글쓴이의 일상적 삶과 내밀한 사고가 그대로 녹아든 에세이라면 더욱 그렇다.
일상 가운데 글로 남겼을 만큼 의미 있는 사건으로부터 글쓴이가 어떤 감상과 교훈을 얻어냈는지는 에세이의 주된 소재가 되곤 한다. 한 편의 에세이를 읽고서 글쓴이에게 특별한 감상을 갖게 되는 건 그래서 당연하다. 일상 가운데 가까운 이에게조차 그와 같은 경험을 전하는 일이 흔치 않다는 점을 떠올리면 에세이를 읽는 것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나는 왜 쓰는가>는 에릭 아서 블레어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조지 오웰이란 필명으로 더욱 유명한 그는 설명이 필요 없는 세계적 문호다. <동물농장>과 <1984>란 걸출한 작품에 가려졌지만 사는 내내 소설뿐 아니라 많은 평론과 에세이, 시를 발표했다. 개중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카탈로니아 찬가> 같은 작품은 독자적인 명성을 쌓기도 했다.
조지 오웰은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았다. 영국 식민치하에 있던 인도에서 태어났고 영국으로 돌아와 학교를 다녔다. 나름 명성 있는 기숙학교에서 소년기를 보냈으며 성공이 보장된 명문 이튼칼리지에 입학했다. 하지만 다른 학생들처럼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 같은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인도 식민경찰로 나가기를 선택했다.
5년 간 인도에서 근무하고 돌아온 뒤엔 노숙인 생활도 경험했다. 이후 서점에서 한동안 아르바이트를 했고 꾸준히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스페인내전이 발발하자 민병대원으로 자원해 참전한다. 돌아와서는 BBC에서 라디오PD로 참전 인도군을 위한 홍보방송을 제작한다. 몇몇 작품이 잘 팔려 전업 작가가 된 뒤에는 다양한 형식의 글을 여러 매체에 기고한다.
만약 삶이 글을 만든다면 오웰 만큼 준비된 작가도 흔치 않을 것이다.
<나는 왜 쓰는가>는 한국엔 많이 번역되지 않은 오웰의 에세이 29편을 한겨레출판사가 가려뽑아 출간한 것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함께 이한중씨가 번역했다.
책에 실린 에세이는 소년기를 보낸 세인트 시프리어스 학교 시절부터 인도 식민경찰, 노숙인, 서점 아르바이트, 스페인내전 참전, BBC 라디오PD로 일하던 시기까지 다양한 시절의 경험을 다룬다. 인도에선 영국 공무원을 바라보는 군중의 열망에 맞춰 해가 되지 않는 코끼리를 쏘아 죽이고, 부랑자 시설에선 숨겨놓은 담배꽁초를 몰래 피우며, 서점에선 그렇고 그런 책을 뽑아드는 손님에게 경멸하는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BBC에선 죽어가는 장르인 시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고민을 다하고, 잘 알려진대로 스페인내전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한다. 더 나은 글을 고민하고, 흔해빠진 서평과 영화평을 쓰는 자괴감도 감추지 않는다. 셰익스피어를 비난한 톨스토이에 대해 박한 평가를 내리고 위인이 아닌 정치가로서 간디를 재평가하기도 한다. 됨됨이에 비해 위대한 작품을 낳은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작가와 묶어 비평한 글도 인상적이다.
오웰의 에세이 속에선 그가 마주했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직접 대화를 나눠보지 않았지만 가까이, 또 멀리서 관심 갖고 지켜봤던 사람들이다. 사형수와 그의 목숨을 끊은 뒤 아무렇지 않게 술을 마시러 나가는 관리들, 군중들과 그 군중의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지배자들, 갈수록 비굴해지는 부랑자들과 그들을 돌보며 억압하는 관리자들 같은 이들 말이다. 때로는 오웰의 곁에서 숨을 거두고 아무렇지 않게 치워지는 몸뚱이들이 그의 글에서 되살아나 특별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중략)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2분 뒷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사람 하나가 사라질 것이고,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26p '교수형' 중에서
사형수의 죽음에서 세상이 그만큼 누추해질 것을 내다보고,
또 하나는 내가 민병대에 입대한 날 위병소에서 내 손을 잡아준 이탈리아 민병대원이다. (중략) 고작 1~2분밖에 보지 못했던 이 사람의 얼굴은, 나에게 이 전쟁이 정말 어떤 것이었는지를 일깨워주는 하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는 나에게 유럽 노동계급의 정화다. 어느 나라든 경찰에게 시달리는 사람들, 스페인 전장의 공동묘지를 메우고 있으며 지금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썩어가고 있는 수백만이나 되는 사람들의 상징 말이다. -157p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중에서
전장에서 나눈 짧은 만남에서 유럽 노동계급 전체가 마치 한 사람의 몸 안에 스며들기라도 한듯 기억하며,
시를 대중화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후천적인 억제를 완화시켜주는 일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기계적인 야유를 내뱉는 대신에 듣도록 해주는 문제다. 내가 방금 들었다는 애국시 나부랭이가 아마도 그랬을 것처럼, 진정한 시를 다수 대중에게 '정상'으로 보이도록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것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171p '시와 마이크' 중에서
마땅히 기억돼야 할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남다른 고민을 하기도 한다.
오웰의 글이 집요하게 사람을 다루는 건 그의 관심이 결국은 사람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학교와 식민경찰시절을 돌이켜보면 다른 누구보다 억압에 쉽게 익숙해졌던 오웰이지만 끊임없이 반성하고 참회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희구하는 그에게서 나아가야 할 길을 찾는다.
오웰보다 나은 글을 쓸 자신이 없으므로, 책의 제목이 된 에세이의 마지막 구절로 글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300p, '나는 왜 쓰는가'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