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4월 12일 동작동 산 28번지 무허가 단칸 셋집에서마저 쫓겨난 김선희(63)와 염낙원(36)은 한 언론사를 찾아 자신들의 딱한 사정을 호소했다. 3년 전 경기도 광릉에서 양계업을 시작했다가 세 차례에 걸친 사료파동으로 빚만 지고 무허가 단칸 셋집에서마저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선희와 염낙원은 독립운동가 염온동(1898-1946)의 아내와 아들이었다. 이들은 "독립유공자 유족이라고 특전을 베풀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계보조의 터전이라도 마련해줄 수 없겠느냐"는 하소연도 했다.
염온동, 그는 누구인가
김화 출신의 염온동은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김화공립보통학교 제1회 최우등 졸업생으로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18세 때부터 독립운동자들과 교유하여 비밀결사에 참여했던 염온동은 1919년 3·1 만세운동 당시에는 고향인 김화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1년 4월에는 상해로 건너가서 전차 감독으로 근무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염온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에 참여했다. 1923년 4월에는 임시의정원 강원도 의원에 선출되어 1927년 1월까지 의정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26년 7월 상하이 3·1당에서 창립된 임시정부경제후원회(위원장 안창호)에서는 이유필·임필은과 함께 회계검사원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이 후원회는 임시정부를 유지하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후원금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였다.
그는 또한 1927년 3월에는 상하이 한인청년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청년회의 진보 발전을 기하는 데 있어 청년회의 연맹을 필요로 하여' 결성된 북경·상하이·광주·남경·무한 등 5개 지역 한인청년회의 연합체인 한인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염온동은 소설 <상록수>와 불후의 저항시 <그날이 오면>의 저자로 유명한 심훈의 항주 시절 친구이기도 했다. 심훈은 1931년 한 잡지(「천하의 절승 소항주유기(蘇杭州遊記)」, 『삼천리』 제16호)에 쓴 글에서 1920년대 초 중국 망명 시절 사귄 염온동에 대한 그리움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기도 했다.
"그때에 고생을 같이하여 허심탄회로 교유하든 엄일파, 염온동, 유우상, 정진국 등 제우가 몹시 그립다. 유랑민의 신세 부유와 같은지라 한번 동서로 흩어진 뒤에는 안신(雁信)조차 바꾸지 못하니 면면한 정회가 계절을 따라 걷잡을 길 없다.(맞춤법은 현대어로 바꿈)"
심훈이 1921년부터 1923년 귀국하기 전까지 항주 치장대학(之江大學)에서 공부했는데, 이때 염온동과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염온동이 이때 함께 지강대학에 다녔을 가능성도 있다.
염온동은 1929년에는 남경에서 민병길·윤기섭·성주식·신익희·연병호·최용덕·안재환·김홍일 등과 함께 한국혁명당을 조직한다. 한국혁명당은 사상의 정화와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꾀함과 동시에 산하에 무력 행동대인 철혈단(단장 안재환)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철혈단은 기관지로 <우리길>도 발간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였고, 단원 훈련과 교양에 이바지했다.
염온동은 한국혁명당에서 김창화·나월환·이건호·이영희·최경수 등과 함께 중견 간부로 활동했다. 한국혁명당은 1932년에 이르면 당원이 약 40명가량으로 늘어났고, 상하이와 난징 등지에서 계속 활동했다.
1932년 염온동은 다시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1935년 11월까지 활동했다. 1934년 한국혁명당과 만주에서 온 한국독립당이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을 결성할 때도 신한독립당에서 활동했다.
염온동은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본격적으로 벌이던 1941년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부관처 관리과장으로 임명되어 근무했다. 1944년 6월 5일부터는 임시정부의 군무부 총무과장 겸 선전부 간사로 임명됐고, 같은 해 9월에는 군사편찬위원회 간사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염온동을 군무부 총무과장으로 추천한 사람은 당시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으로 있던 의열단 출신의 김원봉이었다. 염온동은 1945년 3월부터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다시 선출되어 해방될 때까지 활동했다.
염온동의 삶은 말 그대로 8·15 해방 때까지 일생을 조국의 해방을 위한 헌신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패망 후 귀국을 준비하던 중 1946년 1월 해방된 조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중국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해방된 조국이 염온동의 유족에게 한 일은?
이렇듯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음에도 염온동은 1977년에 가서야 뒤늦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그러니까 염온동의 부인과 아들이 조선일보를 찾아 어려움을 호소한 1972년 당시 염온동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염온동의 부인과 아들은 1955년, 월북한 박건웅과 연계하여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제3세력을 구축하려 했다는 죄로 김선희(김선의)는 무기징역을, 염낙원은 징역 20년을 언도받고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들이 언제까지 감옥살이를 했는지에 대한 언론보도는 없지만, 이들은 1972년의 <조선일보> 보도보다 훨씬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산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김선의 간첩사건'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납득하기 힘든 대목이 한둘이 아님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김선의를 포섭하여 '남한 정계에 3세력 구축' 지시를 내렸다는 박건웅(1906-?)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임시정부요인 출신으로 해방정국에서는 중도좌파에 속해 있었고, 1950년 6·25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인물이다.
하지만 중앙정보부가 운영하는 내외경제연구소가 1962년에 발표한 글에서 박건웅에 대해 1951년에 이미 숙청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고, 대한민국 정부가 1990년에 박건웅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사실에 비추어볼 때 그가 김선의를 포섭하여 위와 같은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오히려 19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협상파 구축'이니 '제3세력 구축'이니 하면서 야당의 유력한 대권주자인 신익희와 조봉암을 포섭대상으로 언급한 것 자체가 '김선의 간첩사건'은 거꾸로 이승만 정권이 벌인 정치공작의 산물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결국 독립운동가 염온동의 유가족은 1955년 이승만 정부가 벌인 정치공작의 희생양이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염온동의 유가족이 1972년 이후 어떻게 생활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아들 염낙원이 광복회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과 시흥군 광명에 있는 광복아파트에서 다른 독립유공자 후손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담고 있는 한 언론의 보도가 있어 우리의 죄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해주고 있을 뿐이다.
아들 염낙원은 2015년부터 4년간 광복회 경기지부장을 맡는 등 광복회에서 꾸준히 활동해 왔고, 지부장 임기를 마친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정이 필요한 묘비
염온동은 중국에서 서거한 지 32년 만인 1978년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에 안장됐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염온동의 묘비 뒷면에 서거년도가 1946년이 아닌 1945년으로 잘못 표기된 채 지금까지 계속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독립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국방부에서 묘비를 제작할 당시 미처 귀국하지 못한 상황에서 1946년 1월 24일에 중국에서 병사한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고, 임의로 1945년 1월 24일 별세한 것으로 수정하여 제작한 듯하다.
당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중에는 해방 직후인 1945년에 귀국한 분들이 많았지만, 한국광복군의 김학규와 김홍일 같은 인물은 심지어 1948년에 귀국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들에게는 해방 이후에도 동포들의 안전한 귀국을 돕는 활동 등 중국에서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많았던 것이다.
독립유공자묘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듯 염온동의 묘비를 비롯하여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부분이 참으로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