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5·18 민중항쟁 당시 가두방송을 진행했던 전옥주씨가 세상을 떠났다.
전옥주씨는 1949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1980년 당시에는 원광대학교 체육학과에서 무용을 배운 뒤 무용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해 오월, 전씨는 이모의 일을 돕기 위해 광주에 왔다. 전두환 군부에 맞서 광주시민들이 열흘 간에 걸쳐 처절한 항쟁을 전개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5월 18일 전옥주씨는 여느 광주시민처럼 금남로에 나갔다. 그는 그곳에서 학생들이 군홧발에 짓밟히며 연행되는 광경을 목격했다. 전씨는 그해 오월 여느 광주시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항쟁에 뛰어들었다. 당시 광주에는 '지금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뒤늦게 광주의 '사태'를 보도하기 시작한 언론들은 "불순분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내용의 왜곡 보도를 자행했다.
시민들 사이에서 자체적인 언론의 역할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에 전씨는 동사무소에 가서 스피커와 앰프를 챙겼다. 담당 공무원이 손사래를 쳤지만, 전씨는 수중에 있던 현금 7만 원을 숙직실에 두고 나왔다.
이후 그는 트럭에 스피커를 부착한 채로 광주 전역을 돌며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을 통해 지금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소상히 전달되었다. 시민의 군대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손에 쥔 총을 시민을 향해 겨누고 있음이 알려졌다.
상황을 제대로 알리는 언론이 필요했다... 7만원에 트럭에 스피커를 싣고
5월 20일 계엄군이 광주역 앞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처음으로 조직적인 발포를 감행했다. 전날인 19일 광주고 앞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으나, 20일의 발포는 그야말로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집단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4명의 시민이 계엄군의 총탄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당시 계엄사령부는 "민간인 피해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5월 21일 분노한 시민들이 전날 광주역에서 계엄군에 의해 살해당한 시민 두 사람의 시신을 리어카에 싣고 금남로에 왔다. 전옥주씨는 마이크를 잡고 시민들을 향해 호소했다. 국민의 군대가 국가를 지키라고 쥐어준 총을 시민들을 살해하는 데에 사용했음을 알렸다.
이때 금남로에 모인 시민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시민대표를 선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전옥주, 김범태씨 등 4명이 대표로 선발되었고 이들은 도청에 들어가서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면담했다.
시민대표들은 계엄군 철수, 연행자 석방 등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도지사는 전옥주씨에게 "방송을 통해 시민들을 안심시켜 주면 잠시 뒤에 밖으로 나가서 위로의 말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을 한참 넘기고도 도지사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시작되었다. 계엄군이 금남로에 모인 비무장 시민을 향해 무차별적인 발포를 감행했다. 기록에 의하면, 이날 최소 54명의 시민이 군인의 총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광주시민 수백 명이 총상을 입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총을 들기 시작했다. 오후 5시 30분을 기점으로 전남도청에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에서 완전히 빠져나갔고 광주를 철저히 고립시켰다. 그 누구도 이 도시를 빠져나갈 수 없었고, 그 누구도 이 도시에 들어올 수 없었다. 광주는 외로운 섬이 되었다.
그럼에도 전옥주씨는 가두방송을 지속했다. 광주시민들에게 지금 이 도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려야 했다. 제 나라 군인들에 의해 '학살'이 자행되었지만, 여전히 시민들은 기존 질서에 익숙했다. 시민들은 광주 의거에 '북한'이 개입하지 않도록 철저히 수상한 사람을 감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민대표로 전남도지사와 협상했던 전옥주씨가 타깃이 되었다. 이미 이전에도 한 차례 '간첩'으로 몰려 의심받았던 전씨는 23일 또다시 간첩이라는 모함을 받았다. 여성이 앞장서는 것이 쉽지 않던 시절, 마이크를 잡고 시민들의 마음을 흔들던 행위 자체로 의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전씨는 기독병원에 시신을 놓고 돌아오는 길에 간첩이라는 모함을 받아 시민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는 그 길로 보안대로 끌려갔다.
5월 23일 전옥주씨는 끌려갔지만 가두방송은 끝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군부의 폭력에 경악해 항쟁에 뛰어들었던 차명숙씨와 박영순씨가 트럭에 부착된 스피커를 통해 매일 가두방송을 했다. 박영순씨는 27일 최후의 항전 당시 전남도청에 끝까지 남아 방송실 스피커를 통해 '5·18 마지막 방송'을 진행했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광주는 빛날 수 있었다.
전옥주는 끌려갔지만 가두방송은 끝나지 않고
보안대로 끌려간 전옥주씨는 온갖 고문에 노출되었다. 군부는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폄하하기 위해 '간첩'을 필요로 했다.
가두방송으로 시위대를 이끌다가 체포되어 보안대로 끌려온 전옥주는 여자로서 견디기 어려운 온갖 치욕스러운 고문을 당했다. 야구방망이와 쇠파이프에 맞아 팔은 하루 만에 부러져나갔고 온몸은 퉁퉁 부어올랐다. 열흘 동안 한잠도 자지 못한 것은 물론 화장실에도 못 가게 하면서 가슴에 총을 겨눈 상태로 잔디밭에서 용변을 보라고 했다.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치욕스런 성고문이었다. 수사관은 내 옷을 다 벗긴 뒤 총 개머리판과 나무 자로 음부를 마구잡이로 후비고 짓찧으면서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폭언과 만행을 저질렀다. 사흘째부터 심한 통증과 함께 하혈이 시작됐지만 성고문은 멈추지 않았다. 예리한 송곳으로 무릎을 마구 찌르는가 하면 방망이로 온몸을 미친 듯이 때렸다. 쇠파이프로 맞아 척추뼈 두 개가 내려앉았다."
- 김희경 '광주항쟁 가두방송의 여인 전옥주의 충격 고백수기: 간첩조작 성고문도 버텨냈다', <신동아> 1996년 9월호
그해 9월 전옥주씨는 광산경찰서로 이감되었다. 군부는 광주항쟁 당시 체포된 여성들을 모두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분리 수감했다. 당시 광산서에는 5·18 당시 가두방송을 진행했던 전옥주, 차명숙, 박영순 세 사람과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던 중 계엄군에게 체포된 여성들이 있었다.
군부는 여성 연행자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군부는 이미 5.18에 대해 "학생운동가이자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이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조종을 받아 기획한 내란"이라는 시나리오를 완성해둔 상황이었다.
그날 평범함을 위대함으로 바꾸어낸 이들
전옥주씨는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1년간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이는 5·18에 참여한 여성이 받은 형벌 중 가장 무거운 축에 속했다. 전씨는 출소 이후에도 뿌리 깊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3년간 하혈이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방송을 진행했던 박영순씨도 마찬가지였다. 박씨는 출소 직후 결혼하여 광주를 떠났으며 3년간 시아버지가 매일 자전거에 태워 병원에 데려가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박씨는 2015년에야 광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2021년 2월 16일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광주항쟁 당시 가두방송을 진행했던 전옥주씨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이었다. 그가 겪어야 했던 지난 시절의 아픔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나누어야 했던 짐이었다.
그날의 항쟁을 경력 삼아 출세한 이들도 더러 있으나, 그날 평범함을 위대함으로 바꾸어낸 이들에게 우리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빚을 졌다.
삼가 고 전옥주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