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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기념공원 안 전통 가옥 사랑채에 봉안된 허균 영정 ⓒ 나무위키
 
허균이 연경에서 취득한 또 하나는 천주교 신앙과 천주교 관련 서적의 구입이었다.

한국천주교의 전래는 1784년 (정조 8) 3월 이승훈이 중국 연경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귀국하여 권철신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것은 한국천주교사에서 정설처럼 굳어진 내용이다.

그런데 학계 일각에서는 오래 전부터 허균이 한국 최초의 천주교신자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조선시대 유교가 국가의 근간이 된 체제에서 불교신자라는 이유로 배척되었던 인물이 허균이다.

절대 왕권과 주자학의 엄격한 강상론(綱常論)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는 형식화된 성리학에 도전하여 불교와 도교와 무속을 믿고 여기에 천주교를 최초로 수용하는, 사상적으로 대단히 폭이 넓은 당대의 보기드문 자유주의 지식인이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유ㆍ불ㆍ도ㆍ무 그리고 천주교를 지식과 신앙으로 소화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가 만약 반역죄로 처형되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루소(1712~1778)에 필적하는 사상가가 되었을지 모른다. 허균은 루소보다 140여 년 전에 살았던 인물이다.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하던 시대에 이를 알고 '서학(西學)'이라는 말을 붙힌 사람은 유몽인(柳夢寅, 1559~1623)과 이수광(李晬光, 1563~1629) 그리고 허균이었다. 

유몽인은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일본을 비롯한 동남쪽의 여러 오랑캐들이 서교를 믿고 있는데도 유독 조선만이 알지 못하였는데 허균이 중국에 가서 그들의 지도와 「게십이장(偈十二章)」을 얻어가지고 왔다"고 기록하였다. 

「게십이장」은 천주교에서 사용하던 기도문으로 「12단(十二端)」을 말한다. 12단은 성호경(聖號經)ㆍ천주경(天主經)ㆍ성모경(聖母經)ㆍ종도신경(宗徒信經)ㆍ삼중경(三重經)ㆍ고죄경(告罪經)ㆍ소회죄경(小悔罪經)ㆍ영광경(榮光經)ㆍ천주십계(天主十誡)ㆍ성교법규사규(聖敎法規四規)ㆍ삼덕송(三德頌)ㆍ봉헌경(奉獻經) 등을 일컫는다.

허균이 중국에서 가져온 「게십이장」이 『천주실의』 등 단순한 천주교 서적이 아니라 기도문이었다면 그는 분명히 서교를 학문적으로만 탐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일상적으로 외우고 신봉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조신권, 「초기 천주교가 문학사에 남긴 의의」)
  
조선 중기 이수광이 편찬한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적 책 지봉유설(왼쪽), 조선의 세시풍속이 기록된 최남선의 ‘조선상식(朝鮮常識)’ 풍속 편(오른쪽) 조선 중기 이수광이 편찬한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적 책 지봉유설(왼쪽), 조선의 세시풍속이 기록된 최남선의 ‘조선상식(朝鮮常識)’ 풍속 편(오른쪽)
조선 중기 이수광이 편찬한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적 책 지봉유설(왼쪽), 조선의 세시풍속이 기록된 최남선의 ‘조선상식(朝鮮常識)’ 풍속 편(오른쪽)조선 중기 이수광이 편찬한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적 책 지봉유설(왼쪽), 조선의 세시풍속이 기록된 최남선의 ‘조선상식(朝鮮常識)’ 풍속 편(오른쪽) ⓒ 서울대학교, 수원 남문서점
 
조선후기 실학자 중에 허균의 천주교신자설을 뒷받침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허균은 총명하고 문장에 능하였다. 이 때문에 부박한 데로 흘렀고, 그의 글 때문에 그의 문도가 된 자들이 하늘의 학설을 외쳤는데 실은 서쪽 땅의 학(學)이었다. 그들과는 하늘과 땅을 같이할 수 없고 사람과 견주어 같다고 할 수 없다."

성호 이익도 『성호사설』에서 주장한다.

"일본의 남쪽으로 여러 달 배를 타고 가면 구라파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 도가 있어 그리스도라고 하며 다른 말로 하늘을 섬긴다. 그 글에 게십이장이 있으니, 불교도 아니요 선교도 아닌 다른 도풍을 세워 마음 쓰고 이를 행하며 하늘에 어긋남이 없게한다. 예수의 형상을 그려 그것을 받들어 섬기고 삼교(유ㆍ불ㆍ선)를 배척하기를 원수같이 한다.… 허균이 중국에 가서 그 지도와 게십이장을 구해왔다."
  
성호사설 성호사설
성호사설성호사설 ⓒ 전주국립박물관
 
안정복은 『순암집(順菴集)』에서 말한다.

"서양의 책이 선조 말년에 동쪽으로 왔는데, 이름난 벼슬아치나 큰 선비들이 보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리하여 그것을 제자백가의 도교ㆍ불교 따위와 견주어 보면서 서재의 진귀한 것으로 갖추어 두고 있는데, 그것 중에서 취할 것은 상위(象緯, 대수), 구단(句腶, 기하)의 술뿐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고금을 통하여 하늘의 학을 말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 중에서 옛적에는 추연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허균이 있다."

박지원도 『연암집(燕岩集)』에서 말한다.

"『게십이장』이 있는데 허균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그것을 얻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서교가 동쪽으로 온 것은 아마 허균으로부터 시작되어 주창된 것이다. 지금 서교를 배우는 무리들은 허균의 뒤를 쫓는 무리들이다."

이규경은 『택당집(澤堂集)』에서 이렇게 썼다.

"허균이 처음 천주교의 책을 얻어가지고 와서 배우고는 말하기를 '남녀의 정욕은 곧 천성이요, 윤기의 구분은 성인이 가르친 것이다. 하늘이 성인을 내어 가장 높였으니 내 하늘을 따를 것이요 성인을 따르지는 못하겠다'고 하니, 그 천주를 믿는 조짐이 이에 나타났다."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 이능화는 『조선기독교 급 외교사』에서 이규경의 저술 내용에 의견을 붙였다.

"『택당집』에서 찾아보니 허균이 선교와 불교의 글을 읽었다는 것만이 있고 천주교의 설에 대해서는 없었다. 그러나 그 '남녀 정욕' 따위의 말을 가지고 볼 것 같으면 이익이 말한 '선교, 불교의 책'은 거의 천주교의 책을 의미한 것이 의심할 것이 없으니, 이규경의 말이 옳은 듯하다. 무엇 때문이냐 하면 선교ㆍ불교의 글에는 본디 남녀의 정욕을 꺼리는데 천주교에서는 아내 갖는 것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허균은 1602년 원접사 이정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는 것을 시작으로 중국 사신과 3회에 걸쳐 접촉하고, 두 차례 중국을 다녀왔다. 허균이 중국을 다녀올 무렵에는 마테오 리치가 연경에서 한창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허균은 "갑이년ㆍ을묘년에 두 번이나 중국의 연경에 사신으로 가서 집의 돈을 시원스럽게  내놓아 책을 산 것이 4천권쯤이나 되었다."(「한정록(閑情錄」) 고 할 정도로 중국을 오가며 많은 양의 책을 구해왔다. 그 중에는 천주교 관련 책도 많았을 것이고, 그는 이를 신앙하였을 터이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허균#허균평전#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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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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