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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에서 이어집니다.)

남편이 산수유 열매를 털자고 제안한 내일이 오늘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주문한 과실 수확기가 아직 도착도 하지 않은 오늘이었다. 수확기 없이 열매를 털자고 한 건, 늘 그렇듯 결과적으로 경솔한 제안이었다.

약속이 오전 8시였는데, 7시 45분에 내가 마을회관 앞에 도착했을 때는 남편을 제외한 모든 회원이 초조한 표정으로 마당에서 웅성대고 있었다. 다들 남편을 기다릴 생각도 하지 않고 작업반장을 뽑자고 의견을 모았다. 주민들 모두 남편이 늦잠꾸러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런 그가 오전 8시에 모이자고 말했을 때, 어이구, 또 경솔하게 말을 막 뱉아뿌네, 라고 생각했을 것이 뻔했다.

조 짜기

투표 결과 정 감사님이 작업반장으로 선출되었다. 정 감사는 음천마을에서 태어나 고등학생 때까지 살다가, 외지에서 직장·사랑·사랑·사랑·결혼·육아·사업·육아·사업·실패·재기·은퇴의 연대기를 작성한 뒤 다시 이곳으로 귀촌한 분이다. 한 인간의 60년이 넘는 삶을 이렇게 대충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대단히 죄송스러울 뿐이다.

여하튼 평소에 말수도 적고 약간 수줍음을 타는 분이라 생각했는데, 작업반장으로서의 각오를 밝히는 자리에서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정 감사는 말수가 적었던 게 아니라, 말을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면'을 연발하는 걸 보고, 이분이 혹시 교장 선생님 출신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작업반장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서, 17명의 인원을 깔개조(組), 털기조, 운반조, 선별조, 세척조, 기계조로 나눴다. 제법 그럴듯한 체계와 인원 배치였다. 반장이 각각의 팀이 수행해야 할 작업을 지시하고 있을 때, 남편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몹시 가쁘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니 연기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남편은 좀 늦었다고 해서 달리기를 할 인간은 아니니까.

"저는 뭘 할까요?"

하여간 눈치 하나는 정말 빠르다. 벌써 작업반장이 누군지 파악한 듯 정 감사를 향해 남편이 물었다.

"조직도가 이미 다 그려졌으니까, 그냥 깍두기나 해야지 뭐."
"깍두기요? 그러면 일 안 하는 사람들 겁을 주라는 말씀이신지?"
"그 깍두기가 아니라, 그냥 여기서 부르면 여기로 뛰어가고, 저기서 부르면 저기로 뛰어가서 도우면 된다고."
"아, 멀티플레이어 말이군요."
"잡부가 영어로 멀티플레이어인가? 영어는 내 전공이 아니라서."


작업은 처음부터 제대로 엉망이었다. 열매를 따기 전에 산수유나무 주변 바닥에 큼직한 깔개를 펼쳐야 했는데, 줄기의 하단에서 촘촘하게 위로 뻗은 가지들 탓에 깔개를 반듯하게 놓을 수 없었다.

수십 번을 끙끙거리다가 포기하고, 가지들이 솟아 있는 곳에는 허공에다 그냥 깔개를 펼쳐버렸다. 2명의 깔개조는 거의 절반의 실패를 거듭했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관계로 작업반장의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인다는 훈계를 귀에 달고 작업을 해야 했다.

지금 산수유 수집하나? 엉망진창 털기조

그렇지만 털기조의 초라한 행적에 비하면 깔개조는 그나마 훌륭한 팀이었다. 총 5명으로 구성된 이 털기팀은 처음에는 손으로 가지를 훑으며 산수유 열매를 수확했다. 이들이 오전 내내 모은 산수유 열매의 양을 보면 수확이라기보다는 수집이라고 해야 옳겠다. 그것도 아주 조심스러운 수집.
 
 산수유 열매를 맨손으로 수집하는 모습
산수유 열매를 맨손으로 수집하는 모습 ⓒ 노일영
 
전문적인 수집가의 모범적인 동작을 보여준 건 깍두기인 남편이었다. 이 인간은 손바닥으로 가지를 훑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을 핀셋처럼 사용해서 열매를 땄다. 작업반장이 옆에서 계속 구두로 주의를 주다가, 도저히 봐줄 수 없어서 옐로카드를 꺼내도 핀셋의 속도만 조금 빨라질 뿐이었다. 아마도 이 인간의 목표는 레드카드를 받고 작업 현장에서 퇴장을 당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각자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작업이 개시되자 털기조는 그제야 영장류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싸리나무를 꺾어서 쥐거나, 온갖 도구들을 손에 쥐고 나뭇가지들을 때리기 시작했는데, 맨손으로 시작해서 도구를 사용하는 호모파베르(Homo Faber, 도구의 인간)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반나절이면, 엄청난 속도의 진화라 할 만했다.

털기조의 작업이 수집에서 채집의 단계로 넘어가려는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바닥에 펼쳐놓은 깔개의 대부분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면과 맞닿은 부분보다 가지나 바위 같은 장애물 때문에 허공에 떠 있는 부분이 더 많아서, 산수유 열매는 깔개 위가 아니라 바닥으로 더 많이 굴러 떨어졌다.

이런 혼란한 와중에도 프로다운 근성을 보여준 팀이 운반조였다. 이 운반조는 아비규환의 상황에서도 철저하게 자신의 업무에만 집중했다. 한 나무를 털고 나면, 바닥의 깔개에 떨어진 열매를 플라스틱 양동이에 담아서 선별조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이 팀은, 한마디로 남달랐다.

분업의 개념을 완벽하게 체득하고 있던 이 팀은, 아마도 자신들의 어설픈 개입이 전체 작업의 흐름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큰 그림을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들은 깔개조와 털기조가 악전고투를 펼치고 있는 동안 강 건너 불구경하듯 모른 척했다.

오히려 소평댁 외 2명으로 구성된 이 운반조는 함께 나란히 바닥에 앉아서 깔개조와 털기조의 몸개그를 깔깔대며 즐기기까지 했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이 운반조는 우리 조합의 산수유 사업에서 진정한 승리자라 할 만했다.

섬타던 중평댁-박영감 아저씨가 진정한 승자

산수유 작업 첫날, 중평댁과 박영감 아저씨 외 1명으로 구성된 선별조는 사실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작업반장이 털기조를 도와서 열매를 따라고 지시했지만, 선별조는 도합 220살에 가까운 나이를 내세워 명령 따위는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연륜이 묻어나는 심드렁한 반응에 패기만만한 반장도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반장이 만든 선별조에 군말 없이 참여한 것만 해도 고마워하라는 결연한 표정에, 반장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선별조는 운반조가 가져온 산수유 열매를 마을회관 앞에 펼쳐놓은 깔개에다 붓고, 나뭇잎과 잔부스러기들, 그리고 상태가 좋지 않은 열매를 가려내는 작업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콩 농사를 많이 짓고 있는 중평댁이 집에서 대형선풍기를 가져왔다. 선풍기 바람을 이용해서 잎과 잔부스러기들을 날려버릴 요량이었다. 자신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대형선풍기 앞에서 반장은 또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선별조는 깔개조·털기조의 슬랩스틱 코미디에도 관심이 없었고, 운반조의 박장대소와 포복절도에도 귀를 닫았으며, 기계조의 기계를 향한 저주와 욕설에도 초연했다. 선별조는 농사용 방석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절대고수(絶代高手)에게서나 볼 수 있는 초월적 동작들을 선보였다.
 
 산수유 나뭇가지를 도구를 이용해서 터는 모습
산수유 나뭇가지를 도구를 이용해서 터는 모습 ⓒ 노일영
 
대형선풍기가 뿜어대는 강풍에 흰 머리칼을 휘날리며, 콩·팥을 가려내던 경험을 바탕으로 시원찮은 열매들을 가려내기 시작했는데, 모든 움직임에는 한 치의 군더더기도 없었고,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한 몸놀림이 아름다움을 넘어, 보는 이를 황홀경으로 몰고 갔다.

선별조인 중평댁과 박영감 아저씨는 서로의 작업에만 몰두했다. 김영감 아저씨가 소문낸 그들 사이의 '썸'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두 사람의 손가락이 우연히 가볍게 스쳤고, 두 사람의 얼굴 근육이 동시에 살짝 떨리는 장면을 포착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경련일 수도 있었다.

선별조가 가려낸 산수유 열매를 흐르는 물에 세척하는 세척조는 나 혼자라서 조(組)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민망했다. 하지만 형식과 내용의 조화와 일관성을 중시하는 반장이 자신이 만든 용어를 고집해서 결국 세척조라는 이름을 나 혼자 감당하게 됐다.

점잖던 사람들도 개망나니가 되다

기계조는 3명이었다. 평균 연령 50대 중반의 남자들이었는데, 마을의 인구 구성에서는 젊은이들이라 할 만했다. 그들은 모두 다 귀농·귀촌을 한 사람들이었고, 평소에 언행이 올바르고 점잖다는 평가를 받는 이들이었지만, 산수유 제피기는 한순간에 이 사람들을 거칠고 다혈질이며 욕 잘하는 개망나니들로 개조를 해버렸다.

여러 과정을 거쳐 어렵사리 도착한 산수유 열매를 이 기계는 엉망진창으로 짓뭉개버렸고, 더구나 5분 간격으로 기계는 쇳소리로 된 소프라노의 비명을 질러댔다. 제아무리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이 덜떨어지고 미친 기계를 다루다 보면,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 사는 소인배로 변할 터였다.

씨를 뺀 산수유 열매를 만든 게 아니라, 이렇게 혼을 뺀 우왕좌왕·어영부영·흐지부지·얼렁뚱땅·허둥지둥의 순수한 열매 결정체를 만들며 허무하게 작업 첫날은 끝나버렸다.

#마을기업#협동조합#지리산의식주연구협동조합#함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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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다가 함양으로 귀농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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