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 경술국치날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경술국치날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 ⓒ 추준우
 
신익희는 한성외국어학교에 다닐 때 지금의 새문안교회 옆 이윤신이라는 고향 친구집에서 하숙을 하였다. 동기생으로 평생 지우 관계이던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의 회고다. 

내가 입학했을 때는 영어부 1학년에 갑, 을 2개 반이 있어 학생수는 1백여 명이 넘었다. 우리 학급에는 해공 신익희 군과 공화당 당의장을 지낸 정구영(鄭求瑛) 군, 그리고 윤비(尹妃)의 남동생 윤홍섭(尹弘燮), 사촌동생 윤정섭(尹貞燮) 등이 있었다.

나보다 두 살이 위인 신익희 군은 명석한 두뇌와 원만한 성품으로 동료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한 고향(광주(廣州)) 친구 이윤신(李允信)의 집에 기숙했던 그는 15세 소년 시절에도 매우 점잖고 조숙했다. 

그는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담화회(談話會) 때에 특히 명성을 떨쳤다. 5개부 학생과 전 교직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신군은 이솝 우화(寓話)를 유창한 영어로 말하곤 했다. 암기한 것을 그대로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정확한 발음과 억양, 그리고 제스처까지 능란하게 구사하는 그를 보고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주석 8)

담화회란 요즘의 토론회와 같은 것이다. 한 달에 한 차례씩 열리는 토론회에서 그는 발군의 능력을 보여서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뒷날 독립운동 진영에 함께한 철기 이범석의 회고를 통해 당시 신익희의 어려웠던 생활상과 수재라는 평가를 살필 수 있다. 

유년 시절에 나는 집에서 한학을 배웠다. 외숙 이태승(李兌承) 씨가 나를 지도해 주었는데, 그는 당시 외국어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외숙과 같이 이 학교에 다닌 분으로 해공 신익희 씨가 있었다. 

그 때의 해공은 무척 가난한 학생으로 수재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가세가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구두창은 완전히 없고 발가락만을 덮는 형체만의 목발 구두를 신고 우리 집에 드나들고는 했다. 한때는 우리 집에서 그의 침식을 부담하기도 하고 그때만 해도 가세가 흡족한 형편이라 더러는 해공의 학비도 선친께서 대는 모양이었다. 

해공이 어린 나를 업고 다니며 귀여워 해 준 것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후일 상해에서 해공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눈물어린  것이었다. 

해공은 다시 없이 유하고 정이 많은 성격의 소유자라 암벽에 유리를 때리는 내 성미와 맞을 리가 없다. 그는 나와는 성미가 대조적이었지만, 나는 독립투쟁을 하는 동안 그가 내 선배임을 한 시라도 잊지 않고 있었다. (주석 9)

천성적으로 호방한 성격이었던 그는 가난 속에서도 활기차게 학창생활을 하였다. 축구단을 조직하여 주장으로 활약하면서 짚신을 신고 운동장을 누볐다. 학우들과 날로 기울어가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술잔을 비우고, 그러다보니 주량이 늘어나고 소문이 돌자 한때 가정교사로 있었던 집 주인 이판서가 불러 충고를 해주었다.

3년제 외국어학교는 원래 1911년이 졸업예정인데 1910년 8월 29일 국치 직후인 10월에 문을 닫았다. 학생들의 집단적인 저항을 우려하여 1년여 졸업시기를 앞당긴 것이다.

하루빨리 서양문명을 익혀 나라를 발전시키고자 열심히 공부하던 그는 17세에 나라를 잃은 소년이 되었다. 폐교소식을 전한 스승의 모습과 소년의 심경이다. 

망국의 설움에 눈이 붓도록 운 윤태헌(尹泰憲) 선생이 "너희들 학생들은 나라 일에 너무 관심 두지 말고 공부나 잘하여라. 너희들이 저들만큼 개화되면 되돌려 준단다." 라고 타이르다가 말을 미처 미치지 못하고 울음이 터져 나오는 모양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 조카 정균의 한어과에서도 유정렬(柳廷烈) 선생이 들어와서 나라가 망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나서 끝으로, "우리들이 개화되면 나라를 되돌려 준다 하오. 그러니 상심 말고 공부에 열심하여 저 사람에 못지 않도록 우리도 깨어야 나라를 다시 을 터이니, 아무 잡념 갖지 말고 공부에 열중하도록 하시오." 하며 대성 통곡하여 학생과 선생이 다 함께 울음 바다를 이루었다 한다. (주석 10)   


주석
8> 이희승,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앞의 책, 90~91쪽, 재인용.
9> 이범석, 「나의 교우 반세기」, 앞의 책, 92쪽, 재인용.
10> 『구술 해공 자서전』, 5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해공 신익희 평전] 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해공#신익희평전#신익희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독재타도에 성공한 4월혁명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