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화성의 자연과 역사가 살아 숨 쉬는 화성의 서부 지역을 소개했다. 공룡알 화석산지, 제부도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가득한 동네를 비롯해 화성 당성에서는 예전 화려했던 역사의 자취를 살필 수 있다. 그리고 제암리와 매향리에서는 화성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과거 슬픈 기억들을 다시금 되새길 수 있었다.
이번에는 화성의 도회지 지역이라 할 수 있는 동부로 함께 떠나보려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동탄신도시를 비롯해 병점, 화산, 봉담 등 수많은 도회지가 연담화 돼서 더욱 무섭게 성장하는 곳이라 해마다 도시의 풍경이 계속 바뀌고 있기도 하다. 이 지역은 화성 전체 면적의 10퍼센트가 되지도 않지만 이곳의 인구만 합쳐도 60만을 아득히 추월하고 있으니 그 비중은 어마어마하다.
일단 동탄신도시는 차후에 다시 소개하기로 한다. 아파트와 주택으로 가득한 이 지역을 어디부터 가야 할지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경기도에서 가장 큰 대도시인 수원과 근접해 있기에 전체적으로 수원의 색채가 많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이 지역의 주요 명소도 수원화성의 연장 선상에서 바라봐야 할 곳이 많다.
조선 후기의 마지막 명군인 정조와 그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왕릉이 바로 이 동네에 있고, 그의 명복을 빌었던 원찰(願刹)이자 경기남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인 용주사가 자리하고 있다. 우선 그곳을 가기 전에 향남읍에 있는 화성시 역사박물관으로 가서 그 사전 정보를 낱낱이 파헤쳐보려고 한다.
읍에 이런 박물관이 있다고?
화성 남부에 위치한 향남읍은 읍이라는 명칭의 어감이 주는 이미지 때문에 평범한 시골마을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가서 본다면 온 사방이 아파트 숲으로 둘러 쌓여 있는 발달된 도회지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도저히 박물관이 들어설 입지라고 생각되지 않는 아파트 사이에 자리 잡은 화성시 역사박물관은 과연 어떨지 궁금하다.
원래는 향토박물관이란 명칭으로 출발했지만 화성을 대표하는 박물관으로 성장하기 위해 이런 이름으로 바꾼 듯하다. 1층에는 어린이 체험실이 있어 옛날 사람들의 주거 체험, 문양 찍기, 벽돌 쌓기 등 다양한 체험활동을 통한 살아있는 역사교육을 행하고 있다.
2층부터 본격적인 화성시 역사박물관의 전시실이 이어진다. 보통 역사박물관이 시대별 전시를 이어가는데 비해 여기는 특정한 테마를 가지고 나눈 게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지역 사람들의 생활도구와 오래전부터 전승되어 온 의례, 행사를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생활문화실로 들어가게 된다. 육지와 해상문화가 걸쳐져 있는 화성은 논농사와 어업활동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다. 이 때문에 화성지역의 물산이 자연스레 풍부해지지 않았나 추측해볼 수 있는 전시실이라 할 수 있다.
흥미가 없는 사람이라면 빠르게 지나가도 좋다. 하지만 그다음 전시실인 역사문화실을 꼭 둘러보시길 추천드린다. 화성 행정구역의 변천사를 영상으로 쉽게 알아보며 이 지역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앞서 소개한 화성 당성에서 출토된 유물과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여러 자료들을 보며 터만 남아있어 실감하지 못했던 그 당시의 상황이 어느 정도 그림으로 그려진다.
이제 화성지역의 문중에서 기증한 고문서와 책들이 전시되어 있는 기록문 화실을 마지막으로 박물관 관람을 마무리 짓는다. 위치가 조금 아쉽긴 하지만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다면 괜찮은 박물관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도 보인다.
이제 수원화성이 들어서기 전 이 고을의 읍치가 있던 화산동으로 이동해 보기로 한다. 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의 명칭을 따올 정도로 유명한 화산동은 비록 그 중심기능이 지금의 수원시 자리로 옮겨가 역사가 완전히 뒤 바뀌어 버리긴 했지만 화성 동부지역에서 가장 역사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동네이기도 하다. 이 지역을 이미 수차례 지나갔었던 나로서 한적한 시골에서 점점 번화한 도회지로 변하고 있는 모습이 가장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다.
특히 화산동의 첫 행선지 용주사 주변에는 산사의 고요함 대신 아파트를 짓기 위한 공사의 소음 소리가 거슬려 더욱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조계종 2 교구 본산이기도 하면서 경기 남부지역 최대의 사찰인 용주사는 신라시대 문성왕 시절 854년 갈양사로 창건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정조의 손길이 깃든 절, 용주사
조선 후기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지정된 이후부터 지금의 규모와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용주사의 전신인 갈양사는 고려시대 잦은 병란으로 소실된 후 수백 년 동안 빈터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 터에서 정조대왕은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님의 크고 높으신 은혜를 설명한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감동하여 1790년에 용주사로 크게 재건된다.
더 나아가 지금의 배봉산(서울시립대 뒷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근처로 이장했고, 후에 왕 자신의 묫자리로 삼았다. 수많은 이야기가 깃들여 있는 용주사로 함께 떠나보도록 하자. 조선왕조의 기본 정책이 숭유억불일 정도로 불교를 전반적으로 탄압했지만 용주사는 왕실의 비호를 넘어 그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찰이기에 기존의 절과 다른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우선 왕실의 능묘나 서원에서나 볼 수 있는 홍살문이 용주사의 입구에 세워져 있고, 궁궐, 관아처럼 절을 둘러싼 행랑이 있다. 그 밖에도 용주사에 있는 수많은 유물들과 전각 등, 정조가 얼마나 이 절에 신경을 썼는지 짐작하게 하는 장소가 많다.
절 바깥세상은 신도시를 만들기 위한 소음으로 시끄럽지만 용주사의 영역으로 한 걸음 들어오게 되면 울창한 숲에 가려 다른 세상에 온 듯하다. 그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맞배지붕 양식의 삼문이 우리를 맞아준다. 궁궐 양식을 지닌 삼문은 좌우에 7칸의 행랑을 지니고 있어 그 권위에 누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삼문을 지나면 천보 루라는 누각이 나온다. 여기도 역시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어 궁궐인지 사찰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드디어 천 보루를 건너가면 용주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이 등장할 차례다. 절의 중심 법당을 살펴보면 그 사찰이 가진 지위나 위상이 짐작된다고 한다. 용주사의 대웅보전은 역사가 깊지는 않지만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왕실 사찰답게 그 위세가 당당하다.
이 대웅보전에는 용주사를 대표하는 보물이 있다. 불상 뒤편에 그려진 탱화인 삼세 여래 후불탱화를 그린 분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단원 김홍도다. 그 뒤로 수많은 전각들이 계속 이어져 있다.
범종각에 모셔져 있는 용주사 범종은 에밀레종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종이라 할만하다. 고려 초기의 범종이고 신라의 종 양식을 고스란히 물려받았기에 국보로 지정된 유물이다. 하지만 이런 볼거리 많은 절에 공사 막으로 가리어진 빈터가 보여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은 2020년에 화재로 전소한 호성전의 터라고 한다. 호성전은 사도세자를 비롯해 혜경궁 홍씨, 정조 등의 위폐를 모신 곳이어서 용주사로선 더욱 손실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위폐는 진본이 아니라곤 하지만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해선 안 된다고 본다.
이제 마지막 발걸음은 용주사의 앞마당에 자리한 효행박물관으로 이어진다. 현재는 4단계 거리두기 상황으로 폐쇄되어 있지만 이곳에는 부모은중경판을 비롯해 사도세자와 정조의 위폐 등 수많은 성보 유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제 사도세자와 정조가 모셔져 있는 융건릉으로 가보도록 하자.
덧붙이는 글 | 9월초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권>이 출판됩니다. 많은 사랑 관심 부탁드립니다. 팟케스트 탁피디의 여행수다에서 경기별곡이 방영되니 많은 청취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