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서울 아침 최저기온이 영하 15도까지 곤두박질쳤다. 한겨울로 깊숙이 진입한 모양새다. 습관처럼 켜놓은 TV 화면에는 목도리 등으로 칭칭 감싼 차림새로 얼굴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기상 캐스터가 등장해 올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를 실감나게 전하고 있었다. 덕분에 잊고 지내온 한겨울의 느낌이 온전히 되살아나는 것 같다. 이런 날에는 움직임 자체가 무척 곤혹스럽다. 일요일인 게 천만다행이다.
이처럼 온몸이 오들오들 떨릴 정도로 몹시 추운 날이면 으레 따스한 국물이 곁들여진 음식을 찾기 마련이다. 하지만 난 그 반대다. 추우면 추울수록 되레 덜덜 떨면서 먹어야 제 맛으로 다가오는 음식 하나를 떠올린다. 흔히들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생각하기 십상이겠으나 이는 아니다. 촌스럽게도 난 여전히 믹스커피를 선호하는 체질이기 때문이다.
겨울철이 다가올 무렵이면 각 가정마다 김장 준비로 분주해진다. 우리집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11월 말에 담근 김장김치는 요즘 한창 맛이 좋아질 대로 좋아졌다. 제대로 익은 덕분이다. 연례 행사로 치르는 이 김장 때마다 우리집에서 빼놓지 않고 담그는 게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동치미다. 통무를 소금에 절인 뒤 잘게 썰어 심심한 국물에 곁들여 먹는 이 동치미는 누가 뭐라 해도 역시 겨울철이 제 맛이다.
특히 살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동치미에 말아먹는 국수는 별미 가운데 별미로 꼽힌다. 오늘 같이 추운 날, 아삭한 동치미 무와 꼬들꼬들한 국수 면발을 곁들여 한 입 베어문 뒤 시원한 국물로 목을 축이면, 몸은 비록 덜덜 떨리고 그 차가운 기운이 뇌에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몸이 마비되는 느낌을 사랑한다. 그 특유의 시원함과 개운함 그리고 감칠맛에 절로 탄복하게 된다.
아쉽게도 이 동치미 국수는 한겨울 아주 짧은 시기에만 맛볼 수 있다. 귀한 음식이다. 겨울철만 되면 조건반사처럼 동치미와 동치미 국수가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내 침샘을 자극해 오는 건 이러한 연유 탓이다.
동치미 국수가 맛이 있으려면 무엇보다 동치미를 맛있게 담가야 한다. 그리고 동치미 맛의 차이는 담그는 사람의 손맛에 따라 좌우된다. 우리집 동치미는 아내의 손맛이다. 그런데 그 아내의 손맛은 내 어머니의 손맛에서 비롯됐다. 어머니의 손맛은 어머니의 어머니의 손맛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어머니의 손맛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손맛이다.
그러니까 겨울철이면 유독 생각나는 이 동치미 국수는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그 윗대의 손맛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내리 이어온 소울 푸드였던 셈이다. 누군가는 단순한 무 김치에 불과하다며 동치미를 폄하할지 모르겠으나 이 단순함 속에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전해져 온 전통의 손맛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 기막힌 음식 맛에 매료된 난 겨울철만 되면 자연스럽게 이를 떠올리면서 입맛을 다시게 된 것이다.
아내가 나를 위해 오늘 점심 메뉴도 동치미 국수로 정했다. 동치미 국수를 만드는 과정은 무척 단순하다. 국수 면발을 삶아 그릇에 담고, 동치미 국물과 작게 썬 동치미 무를 곁들이면 된다. 여기에 각자 취향에 따라 설탕 등을 얹어 잘 저어 먹으면 그만이다.
한겨울이 아니면 결코 맛보기 어려운 소울 푸드 동치미 국수. 알고 보면 정성 가득한 이 음식은 오늘 같이 추운 날 덜덜 떨면서 먹어야 제 맛이다. 나는 '얼죽동'(얼어 죽어도 동치미국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