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다니던 작은 식당이 있었다. 점심 '뭐 먹을까' 이것저것 고민하기 귀찮을 때 부서 동료들과 어김없이 한 끼 해결을 위해 찾는 식당이었다. 식당 메뉴는 많지 않았지만 입맛에도 맞고, 결정적으로 사무실에서 무척 가깝다는 장점이 있어서였다. 특별한 메뉴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기본 이상은 되는 식당이어서 동료들 간에도 특별히 호불호가 나뉘지가 않는 식당이라 더욱 자주 다녔던 곳이다.
식당의 주 메뉴는 칼국수, 만둣국, 김치볶음밥, 떡라면이었다. 자주 찾으면서 칼국수부터 떡라면까지 크게 골라먹는 재미는 없었지만 사장님의 적당한 손맛과 적당한 조미료가 가미된 6천~7천 원의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식당을 들락거렸다.
자주 다니다 보니 사장님과 얼굴도 트게 되고, 익숙해지니 우리가 식당을 찾을 때면 사장님의 인사도 '어서 오세요'에서 '또 오셨어요'로 바뀌었다. 그날도 그 식당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 또 오셨어요? 오늘은 뭘로 해 드릴까요?"
네 가지 메뉴밖에 없음에도 메뉴의 선택은 늘 신중했다. 다들 메뉴 선택을 했는지 한 사람씩 자신이 주문할 음식 메뉴를 사장님에게 말했다.
"김치볶음밥이요."
"어 이모, 김치볶음밥 하나 더 추가요."
"전 만둣국이요."
뒤 이어 칼국수를 주문하려던 난 식당을 찾을 때마다 들던 메뉴가 생각이 나 사장님에게 물었다.
"사장님, 전 칼국수도 먹고 싶고, 만둣국도 먹고 싶은데 칼국수에 만두 좀 넣어주시면 안 돼요?"
잠깐의 고민도 없이 사장님은 그러겠다고 흔쾌히 답을 주시고 바로 조리에 들어갔다. 어렵지 않게 그러겠다고 한 사장님을 보며 그간 괜한 고민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우리가 여기 식당 매출을 제법 올려줬으니 가끔 이 정도 부탁을 들어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이 나왔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맛과 양에 난 한 그릇을 맛있게 해치웠고, 당연히 메뉴판에 없는 주문형 음식의 맛을 사장님도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음식을 먹는 내내 주방에서 내 눈치를 보시는 듯해서 엄지 '척'을 보내 드렸다. 내 반응에 그제야 편해진 얼굴로 다른 주방 일을 보기 시작했다. 계산을 하려는데 갑자기 메뉴판에도 없는 음식의 가격이 얼마일지가 궁금해졌다.
"사장님, 오늘 먹은 만두가 들어간 칼국수 얼마죠?"
"그냥 칼국수 값만 줘요."
"아니 그럴 수는 없죠. 그냥 천 원 더해서 칠천 원 드릴게요. 너무 잘 먹었습니다."
칼국수 가격만 달라는 사장님과 잠시의 실랑이 끝에 난 더는 양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단호하게 돈을 내밀고는 식당을 나왔다. 그 일이 있은 후 다시 며칠 뒤 그 식당을 또 찾았다. 늘 하던 루틴대로 메뉴판을 올려다봤고, 늘 같은 메뉴판임에도 항상 하던 대로 뚫어지게 봤다. 그러다 늘 네 개의 메뉴만 있던 곳에 턱 하니 새롭게 등장한 한 가지 메뉴가 더 있음을 알게 됐다.
"팀장님, 메뉴판에 없던 메뉴가 생겼어요!"
새로운 메뉴를 먼저 확인한 팀원이 먼저 말했다. 나도 낯선 메뉴에 적잖이 놀랐고, 새롭게 생긴 그 메뉴가 내가 가끔 생각하고, 지난번 식당 사장님에게 주문 요청했던 메뉴임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사장님 메뉴판에 칼만두가 생겼네요. 지난번 제가 먹었던 칼국수와 만두가 합쳐진 그 음식 맞나요?"
"아, 지난번에 손님이 한 번 해달라고 해서 해봤더니 손님 반응도 괜찮고 해서 메뉴에 올려놔 봤어요."
거기에 내가 더 놀란 것은 칼만두 뒤에 적힌 가격이었다. 떡하니 책정된 가격이 지난번 내가 지불했던 칠천원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게 우린 모두 새롭게 등장한 메뉴로 통일해서 주문했고, 칼국수와 만둣국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어서 일석이조의 기쁨을 종종 느끼며 그 식당을 더 자주 찾았다.
식당에서 메뉴를 새롭게 추가하거나 새로이 개발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회사라고 생각하면 신제품을 개발하고, 출시하는 일이다. 그렇게 고민하고, 많은 투자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임에 분명하다. 물론 내가 자주 찾았던 식당의 경우는 많은 시간을 들인 것도, 많은 비용을 투자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앞의 이야기들과는 다른 얘길 수 있다.
하지만 난 식당 사장님의 유연한 대처가 너무도 놀라웠다. 자주 오는 손님이라도 바쁜 점심시간에 없는 메뉴 요청에 적절히 대응하고, 대처하는 태도도 박수 받을 만하지만 그렇게 내놓은 메뉴를 새로운 메뉴로 메뉴판에 걸어놓는 유연함과 결단력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일을 하다 보면 유연함이 부족한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런 사람들 중 일부는 고집스럽게 원칙에만 얽매어 원칙을 벗어나는 어떠한 업무도 수긍하지 않는다. 일을 하다 보면 처음에 세웠던 원칙과는 다르게 업무를 진행해야 할 때가 있다. 일을 하는 것도 사람이고, 일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매번 변수가 있기 마련이고, 이런 변수 앞에서는 원칙도 중요하지만 발생한 변수에 대처하는 유연함도 중요하다.
업무를 대하는 태도에 유연함을 갖는 것을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원칙이나 신념을 깬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자신이 세운 원칙은 자신의 태도와 관련된 것이지 업무를 대하는 자세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일을 하다 보면 원칙 안에서 유연한 업무 태도가 필요하다. 변죽이 죽 끓듯이 자주 바뀌는 것도 문제지만 요즘같이 변화가 잦은 세상에 유연함은 필수적인 태도이자 자세이다.
예전에는 강직함이 삶에 의미 있고, 선한 덕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런 강직함보다는 유연함이 필요할 때가 더러 있다. 그렇다고 강직함이 유연함의 반대되는 의미는 아니다. 유연함은 단순히 휜다는 의미보다는 부드럽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융합, 콜라보 등과 같은 단어가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요즘에는 유연함이 오히려 더 필요한 덕목으로 이해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