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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미도 다리
월미도 다리 ⓒ
 
1950년 9월 11일. 인천 송도에서 월미도를 향해 걷다 뛰다 하던 방희순은 넋이 나갔다. 35리(14km) 길을 2시간도 안 돼 걸었다. 월미도다리 입구에 선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 건너편 월미도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제 미군 폭격에 월미도가 온통 불타버렸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만 정말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직접 현장을 목격한 방희순은 망연자실해졌다.

월미도에 폭탄 떨어지던 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검은 구름은 더욱 커졌고, 그녀의 절망도 커져만 갔다. 월미도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가니 있어야 할 이발소가 보이지 않았다. 흙바닥에는 '이발'이라 적힌 나무간판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몇 발자국 더 걸으니 마을 전체가 폭삭 주저앉은 게 보였다. 정신을 다잡은 그녀는 세 번째 골목으로 부리나케 뛰었다. 하지만 자기 집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돌과 흙, 나무만 뒤엉켜 있었다. 무엇보다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희순 혼자서 나무 판자를 뒤집고 맨손으로 흙무더기를 파헤쳤다. 몇 시간을 헤맸는지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악'하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가족의 시신을 찾던 이가 잘려진 시신을 보고 놀라는 소리였다. 1950년 9월 10일 인천상륙작전 실행 전에 인민군의 화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미군 전투기가 월미도에 쏟아부은 네이팜탄은 무려 95발에 달했다. 그러니 집이나 건물뿐만 아니라 시신도 온전한 게 없었다.

매운 연기에 눈물 반 콧물 반이 된 방희순 눈에 한 시신이 들어왔다. 왠지 남편 같았다. 얼굴과 옷은 새까맣게 타버려 분간할 수 없었다. 입을 벌렸더니 금이빨이 보였다. 바로 남편이었다. 그녀는 남편을 가매장하고 그 위에 거적때기를 덮었다. 난리가 그치면 정식으로 매장하기 위해 표시를 해둔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방희순 가족은 인천 송도의 친정에서 곁방살이했다. 아무리 친정이라도 방희순 부부와 자식 둘까지 있으니 눈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 예인선 선장을 하던 남편 정용구(당시 35세)도 처갓집이 불편해 "월미도 가서 먹을 것 가져올게"라며 월미도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일이 화근이 됐다.

월미도에 들어간 그는 그곳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붙들려 야간에 방공호 파는 일에 강제로 동원됐다. 그렇게 섬에서 발이 묶인 정용구는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월미도 폭격을 감행한 미군의 네이팜탄에 목숨을 잃었다.

남편을 잃은 방희순은 막막했지만 자식을 건사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해야 했다. 더군다나 뱃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무거운 몸을 한 그녀는 송도에서 적산가옥 하나를 얻어 아이들과 기거했다. 거적때기로 문을 대신했다. 바다에서 조개를 채취해 껍데기를 깐 다음 인천 시내에 가 팔았다. 왕복 20km 거리였다. 1950년 그해 겨울은 무척이나 추웠다. 이듬해 3월 그녀에게 새 생명이 태어났다. 아버지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하게 될 딸은 손발을 꼬무락거렸다. 

아홉살 구두닦이 소년

정용구의 장남 아홉 살 소년 정지명은 나무 쪼가리를 이용해 구두닦이통을 만들었다. 누가 가르쳐 줄리도 없지만 처음 해보는 구두닦이는 가슴이 설렜다. 송도유원지에서 구두닦이통을 손에 들고 "구두 닦(아요)"을 외쳤다. 처음에는 목소리가 작았지만, '이러다가는 종일 구두 한 켤레도 못 닦겠다'는 생각에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다행히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첫 번째 손님을 맞았다.

첫 손님인 영국 군인이 "헤이, 키드(Hey, kid, 이봐, 꼬마)"라고 불러 지명은 활짝 웃으며 구두닦이통을 열었다. 구두솔에 약을 잔뜩 발라 열심히 칠했다. 하지만 광을 내는 방법을 몰랐기에 구두는 점점 엉망이 돼갔다. 

화가 난 군인은 지명의 구두닦이통을 호수에 내던졌다. 소년은 무작정 호수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통을 건지지 못한 소년은 엉엉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생쥐 꼴을 하고 울면서 집으로 오는 형의 모습을 본 동생 정지은의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호된 신고식을 치른 소년 정지명은 당연히 초등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는 16세에 연탄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산업재해'라는 말조차 없어 보상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젊은 시절 고생만 하던 정지명은 30대 후반에 봉고차에 치였다.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얻은 그는 한참을 고생하다 58세에 사망했다.

정지은이 살아온 이야기

"톡톡."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연인이 소리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목에 나무상자를 건 소년이 서 있었다.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꼬마야, 오징어 하나 줘"라고 주문했다. 소년은 다음 열 좌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도 손톱으로 나무상자를 두드렸다. 말로 하면 영화 감상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1950년 월미도에서 아버지 정용구가 죽고 난 다음 아들 정지은(1944년생)은 생활전선에 나섰다. 아침부터 나무상자를 목에 걸고 영화 상영하는 시간 내내 오징어와 과자를 팔았다. 영화 한 편이 끝나면 목과 팔,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마지막 영화가 끝나는 시각은 밤 11시였다. 이익금은 매점 주인과 나누었다.

일을 마친 정지은이 인천 시내 키네마극장에서 송도 집으로 가는 중에는 상엿집이 있었다. 상여와 그에 딸린 제구를 넣어두는 초막으로 당시 마을마다 있었는데 13세 소년은 상엿집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상엿집을 돌아서 가다보니 집에는 새벽 두시가 돼야 도착했다.
 
 증언자 정지은
증언자 정지은 ⓒ 박만순
 
2년간 극장 점원 생활 후 그는 인천 숭인동 로터리에 있는 대영공작소에 취업했다. 볼트를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일을 하다보면 3~4켤레의 장갑을 끼어도 손에 물집이 잡혔고 퉁퉁 부었다. 그 일은 '일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그래도 전쟁 때보다는 나았다. 아버지가 죽자 정지은 가족은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풀뿌리도 수시로 캐먹었다. 학교 도시락으로 칼국수를 싸간 정지은은 점심으로 면이 퉁퉁 분 칼국수를 먹기도 했다. 

이후 정지은은 명성 카바레에 웨이터로 취직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는데 웨이터는 별도의 월급이 없고, 손님이 주는 팁으로 먹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악단 지휘자에게 "드럼 좀 가르쳐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정지은 눈에는 카바레 악단 중에서 드럼이 제일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배우기 시작한 드럼을 군대에 입대해서 요긴하게 써먹었다. 비록 영어를 몰라서 힘들긴 했지만 말이다.

"다음 곡 준비!" 군악대장의 지시에 단원들은 보면대 위의 악보를 한 장 넘겼다. 정지은은 순간 긴장했다. '고향의 봄' 악보 연주야 어렵지 않았는데 악보 왼쪽 위에 쓰여져 있는 꼬부랑 글씨(영어)가 문제였다. 악기를 연주하는 방법이 쓰여져있는 연주기호가 하필 영어였다.

연주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가 꼬부랑글씨만 나오면 안절부절 못했다. 군악대장이 지휘봉을 들고 연주가 시작되자 귀에 익숙한 '나의 살던 고향은'이 연주되었다. 안단티노(andantino, 조금 느리게)라는 연주기호는 몰랐지만, 연주가 일단 시작되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경험적으로 알았다. 콩나물대가리(악보)는 볼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학력이라고 해야 인천 송도의 옥련초등학교를 나온 것이 전부이니, 정지은이 영어를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팔십을 앞둔 정지은은 요즘 들어 군대 시절 연주했던 '고향의 봄'이 자주 떠오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로 시작되는 노래는 마치 자신의 고향 월미도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무엇보다 고향 월미도를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버지의 삶과 죽음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가매장해놓은 곳이야 찾을 수는 없겠지만 정식매장도 하지 못한 아버지의 영혼은 편안한 쉼을 하지 못하고 하늘을 떠돌 것임이 분명하다. 자신의 고향을 인천시가 국방부에 돈 주고 사들였다는 소식에는 기절초풍할 뻔했다. 그가 꿈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갈 날은 올 수 있을까?
 
 월미도 원주민 주거지(그림 원안의 좌측이 정용구 집). 사진 제공-월미도 귀향대책위원회
월미도 원주민 주거지(그림 원안의 좌측이 정용구 집). 사진 제공-월미도 귀향대책위원회 ⓒ 박만순
 
 

#월미도#한국전쟁#인천상륙작전#네이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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