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재판이 계속되었다. 정치재판이었다.
공산주의자로 몰아 사회적 매장을 시도하다가 실패하면서 다시 사법적 심판을 시도한 모양새였다. 3월 (1976년) 28일, 첫 공판이 열린 이후 10개월 만에 2차 공판이 열렸다. 이 공판을 방청하기 위해 일본의 '김지하를 돕는 모임'의 대표가 방한했다.
7월 7일과 20일 김지하에 대한 제6차와 7차 공판에서 검찰 측은 증인으로, 변절한 지식인 신상초(당시유정희 국회의원)와, 회유과 협박에 의해 불려나온 손정박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인 김지하의 문리대 시절 학우)을 내세워 신문하다.
8월 31일, 제8차 공판이 변호인측 증인인 소설가 김승옥이 출정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연기되다. 이때 변호인측은 함세웅, 문정현 두 신부를 증인으로 요청하다. 9월 14일, 제9차 공판에 김승옥이 출정하여 김지하와의 오랜 교우관계와 학창생활 및 문필활동을 증언한 후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한다"는 결론으로 증언을 끝맺다.
9월 28일 제12차 공판에서 김지하는 변호인측에서 요청한 지학순 주교와 소설가 선우휘에 대한 증인신청이 이유없이 기각된 일과 함세웅, 문정현 두 신부에 대한 증인심문이 비공개로 진행된 일, 또 특별 변호인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신청한 것이 거부된 사실 등을 들어 재판부 기피신청을 내다. 10월 28일 서울고법에서 기피신청이 기각되고, 11월 22일에는 대법원에서도 기각되다.
12월 14일, 제13차 공판에서 변호인단을 통해 이한택 신부가 신학적 입장에서 쓴 〈옥중메모〉에 대한 감정의견서, 시인 구상이 문학적 입장에서 쓴 감정의견서,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가 쓴 소견서가 재판부에 제출되다. 검찰은 반공법을 적용,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하다. 이때 방청석에서 <우리 승리하리라>라는 노래가 터져 나오다. (주석 13)
김지하는 12월 23일 오후 6시부터 9시 40분까지 3시간 20분 동안 최후진술을 했다. 평소의 달변에 그간 쌓인 한과 당한 억울함, 시국관, 학습으로 쌓은 지식은 현하지변으로 거침이 없었다. '현 정권의 작태를 고발한다', '내 조국을 껴안고', '국민 민주혁명에 대하여', '내가 모택동주의자인가?', '통일투쟁은 곧 천주투쟁이다', '나는 무죄입니다'로 나뉘는 내용이다.
서두 부문에서 "특히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의 구형이 나에게는 영광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종신형을 다살다 죽고 나서 다시 부활해서 10년 징역을 다 살라는 뜻으로 알고 더욱 감사하게 생각합니다"라고, 검사의 10년 징역 자격정지 10년 구형을 일거에 희화화시켰다. 부연하면, 그는 이미 무기형을 받고 형집행지로 석방된 신분으로, 여기에 징역 10년을 구형하자 '부활'이란 용어로서 대응한 것이다.
최후진술의 마지막 부문이다.
나는 내가 서 있는 이 법정과 지난 3년간 살아온 이 작은 감옥이 통일환각과 그 휘황찬란한 아름다운 대지의 봄을 향한 대행진의 한 부분임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나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통일환각에 사로잡혀 나의 단조로운 생활을 행복으로 껴안고 수난에 대한 정열을 불태우며 밖에 대한 집착 - 나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깨뜨리고, 끊어버리고, 내던져버리고, 행복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괴로운 행복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서든 맛볼 수 없는 진리의 기쁨이요, 십자가가 던져주는 외로운 눈부심 같은 것입니다. 나의 통일환각은 남이 나를 미친놈이라고 할 때까지 더욱더 감옥 안으로 파고드는 좁은 문에 대한 결단으로써 밖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깨기가 아니라 무수한 환상과 고뇌와 고투 끝에 얻어진 조그마한 결론이요, 행복입니다.
메르쏘(까뮈의 소설 속의 주인공)는 신 없이도 감옥에서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 비결은 썩어빠진 세상에 대한 절망이었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행복해지는 비결을 압니다. 영생과 부활에 대한 다소곳한 소망만이 나를 구원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나는 행복하고 매일매일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무죄가 아닌 어떤 형벌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나는 행복하게 이 길을 내 십자가를 지고 가겠습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진리를 위해서 판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인혁당 사람들은 억울합니다. 그것은 비극입니다. 이 비극은 반드시 원한을 만들어냅니다. 그들과 가족들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칠 때, 하늘은 분명히 머지않은 장래에 역사를 통해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우리 세대 전체의 명백한 불의를 보고도 일신의 더러운 안일과 평안을 위해서 침묵을 선택한 불의의 공범집단으로서 단죄할 것입니다. 여러분(방청객과 모든 사람들) 노력을 아끼지 말아주십시오.(중략)
하느님의 은총이 이 불행한 민족 위에 폭포수처럼 쏟아져서 다시는 샛별같은 청년들이 이 더러운 분단의 비극 때문에 법정에 끌려와서 청춘을 시들게 되는 일이 없도록 끝없이 기원하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주의 성탄절을 맞이해서 여러분에게 복음이 내리고, 나를 박해하고 그렇게 미워하는 현 정부 최고지도자 박정희 선생과 중앙정보부의 고급 요원들에게도 가슴과 머리 위에 흰 눈처럼 은총이 폭폭 쏟아지기를 빕니다. 자비로운 은총이 그래서 모두 용서하시고 모두 축복받기를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석 14)
주석
13> <작가세계>, 41~42쪽, (발췌)
14> 앞의 책, 173~17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