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인들은 오랫동안 샤먼이 묘사하는 영성 세계를 그대로 믿어왔다. 몽골인들의 우주관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구분하지 않으며 인간이 이 세상 또는 다른 세상의 피조물보다 우월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그러나 13세기 몽골이 대제국을 설립하면서 보다 체계화된 철학사상을 구현할 필요가 생겼다. 라마교의 전래는 원제국시기인데 주로 지배층에서 보급 발전되었다. 라마교 고승들은 몽골 상층귀족들은 고대 인도 전설에 나오는 황제들이 환생된 것이기에 그들은 날 때부터 몽골을 다스릴 권리가 있다고 설교했다. 때문에 라마교가 몽골 지배층에 가장 유력한 정신적 통치 도구가 되었다.
제국의 모든 철학사상을 구현한 첫 왕족은 쿠빌라이칸이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티베트 라마승 팍파(Phagpa)였다. 1578년 칭기즈칸의 후손인 알탕칸은 티베트의 지도자 소남 가쵸(Sonam Gyatso)를 만난 후 개종하고 그에게 달라이 라마(몽골어로 '대양'을 뜻함)라는 칭호를 주었다.
알탕칸의 통치기에 수많은 사람이 개종했다. 몽골 청년들은 군인 대신 승려가 되었고 수백년간 빈발하던 전투도 줄어들었다. 크게 안도한 중국은 지속적으로 몽골사원 건설자금을 지원했다. 전투 국가에서 평화국가로 변모한 몽골은 지금까지도 그 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몽골은 유일하게 UN이 승인한 핵 비보유국이다.
불교에서는 불필요한 살상을 금하기 때문에 샤머니즘에 따라 이미 제정되어있던 사냥 금지법 또한 더 강화되었다. 오늘날에도 불교 승려들이 나서서 환경과 야생동물보호를 설파하고 있다.
몽골 불교는 1937년에 거의 사라졌다. 공산주의 정부가 스탈린의 요구로 숙청을 시작해 몽골 전역의 700개 사원을 몰살했다. 최대 3만명의 승려가 학살당했고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진 승려는 그보다 더 많았다. 몽골이 민주화된 1990년이 되어서야 몽골인은 종교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몽골 간당사에서 유학 온 태호스님
19세기 초반 울란바타르에는 100여 곳 이상의 '숨(sum:사원)'과 '히드(khiid:수도원) 그리고 5만명에 달하는 거주민이 있었다. 그러나 1937년에 일어난 종교박해로 소수의 건축물만 살아남았다. 제4대 '복드 게겡(Bogd Gegeen)'이 1838년에 건립한 간당사원도 역시 1937년의 숙청 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1944년 미국 부통령 헨리 윌리스가 몽골을 방문했을 때 사원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자 초이발상 수상은 황급히 사원을 다시 열어 종교 유적을 방치한 사실을 숨기려 했다. 간당사원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전시용 사원에 지나지 않았다가 1990년 이후 본격적으로 종교의례를 거행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 중 한 곳이자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이다.
여수 흥국사에는 몽골 간당사에서 유학 온 태호스님이 계신다. 얼마전 기회가 있어 내가 쓴 몽골기사를 보여주었다. 태호스님은 깜짝 놀라며 어떻게 이런 데를 갔느냐고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몽골 출신인 자신도 못 가봤다고. 그래서 지난 12일 태호스님을 만나 자세한 이야길 나눴다.
흥국사에서 6년째 지내며 김포 승가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태호스님은 "우연히 한국에 오게됐다"며 한국으로 유학 온 과정을 설명했다.
"흥국사 주지인 명선스님이 간당사를 방문해 주지스님에게 한국에서 10명 정도를 공부시켜주겠다고 제의해 간당사 불교대학교 교학처장님이 '한국에 유학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라'고 해서 오게 됐어요. 당시 불교대학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저는 한국이 유명한지는 알았지만 한국이 어떻게 생겼고 한국불교가 어떤지는 전혀 모른 상태였어요. 처음 한국에 왔을 때는 한글이 제일 힘들었어요. 이제 적응이 됐는데 불교 용어를 이해할 수 있는 한몽사전이 없어 한 번 만들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언제부터 어떻게 스님이 됐느냐?"고 묻자, "5살 때 간당사로 출가했다"는 말을 듣고 출가한 사연을 말해달라고 하자 이야기가 계속됐다.
"다른 사람은 부모의 권유에 의해서 하는 경우가 있지만 저는 제가 스님이 되고 싶어서 출가했어요. 우리 집안이 불교 집안입니다. 외삼촌이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는 유명한 스님이어서 저도 외삼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5살 때 할머니가 게르 문 앞에서 손을 잡고 "너 학교 가고 싶냐 아니면 스님이 되고 싶냐?"고 물어 뒤로 돌아 게르 안쪽을 보니까 불상이 보여서 "스님이 되고 싶다"고 하니까 그날 저녁에 승복을 지어주셨단다.
그 다음 날부터 외삼촌한테서 티베트 경전을 배우기 시작했다. 외삼촌과 할머니는 간당사에서 유명한 분으로 108개 염주가 3개이다. 한국에서는 "관세음보살~" 이렇게 경전을 외우지만 몽골에서는 "옴마니반메훔~"을 말하며 경을 외운다고 말한 그가 1937년 사회주의 시절 당시 몽골 불교가 탄압당한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당국이 3만명 정도의 스님을 학살하며 스님이 나쁘다는 걸 영화로, 노래로, 선전을 이용해 국민들한테 주지시켰죠. 옛날에는 몽골 스님들은 결혼 안 했는데 젊은 스님들을 결혼시켜서 불교를 없애려교 했어요. 나이많은 스님들은 학살하고 경전과 법당을 불태웠어요."
3년 전 102세로 간당사에서 돌아가신 간당사 '이시 잠츠' 큰 스님이 겼었던 불교 탄압 시절의 이야기도 들려줬다.
"스님들을 총살시키기 위해 온 군인이 자신의 차례가 됐을 때 앞에 파놓은 구덩이를 향해 '앞으로 가!'라고 했을 때 아는 목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니 어렸을 때 친구였다. 서로 눈이 마주쳤고 총소리가 나자 구덩이에 고꾸라졌는데 귀 옆으로 총알이 날아갔다. 군인들이 가버린 밤에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일어나 돌아왔다."
"한국불교는 시스템이 잘 되어있지만 불교에 대해 깊이 공부하려면 몽골이 좋다"고 말한 그가 한국과 몽골 불교의 가교역할을 해주길 빌며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