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역 여자 화장실에서 20대 여성 역무원이 '스토킹 살인'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 처벌법)'이 시행되고 있음에도 이같은 범죄가 반복되자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해 실질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제도보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서울교통공사 입사 동기였던 전아무개씨에 의해 지난 14일 사망한 A씨는 지난해 10월 불법촬영 혐의로 전씨를 고소했고 지난 1월 스토킹 혐의로 2차 고소를 진행했다. 경찰은 1차 고소 당시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기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재판부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는 16일 CBS 라디오에 출연해 "(법원이 피의자를) 구속 시켜버렸으면 아마 이 여성은 목숨을 잃지 않았을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법원의 '잠정조치 4호' 기각률이 52%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져 스토킹 범죄에 대한 사법부의 인식 개선이 시급하다는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잠정조치는 스토킹 범죄가 재발할 우려가 있을 시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법원이 내리는 결정이다. 경찰이 검찰에 신청하면, 검찰이 법원에 청구해 결정한다. 특히 '잠정조치 4호'가 받아들여질 경우, 가해자를 유치장 또는 구치소에 유치해 피해자와의 완전한 분리가 가능해진다.
잠정조치 4호 기각률 52%에 달해... "73명 피해자, 가해자와 분리되지 못해"
경찰청이 이은주 정의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된 지난해 10월 21일부터 올해 5월 31일까지 경찰이 잠정조치 4호를 신청한 것은 총 141건이다. 법원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68건에 그쳤다. 73건, 즉 51.8%가 기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은주 정의당 의원은 "잠정조치 자체가 피해자를 보호하겠다고 만들어진 제도인데, 7개월여 동안 73명의 피해자가 가해자와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라며 "이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꼬집었다.
김다슬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정책팀장은 "잠정조치 4호 기각률 자체가 너무 높은 상황"이라며 "유치장 또는 구치소 유치를 신청한 건 경찰이 사안의 위중함을 이미 인지했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기각률이 너무 높으며 왜 기각했는지 사유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잠정조치 1호는 서면 경고, 2호는 100m 이내 접근 금지, 3호는 전기통신을 이용한 접근 금지를 뜻한다. 그러나 이를 위반해도 과태료 부과에 그친다. 잠정조치 1~3호로는 실질적인 '피해자-가해자 분리'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반면 잠정조치 4호는 최대 1개월 동안 가해자의 인신을 구속할 수 있다.
이같이 높은 기각률에 대해 조주은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관은 "영장주의에 부합해 잠정조치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 안전기획관은 "경찰이 잠정조치 4호를 신청해도 영장 청구에 준하는 정도의 기준이 요구되고 있다"라며 "잠정조치 4호를 신청할 정도면 굉장히 위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이처럼 기각률이 높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법원도 잠정조치 4호가 결국 피의자의 인신을 구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하기 처리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피의자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일단 피해자의 목숨을 살려야 하지 않겠냐"고 토로했다.
한민경 경찰대 교수는 "잠정조치 기각 요건에 대한 명시가 스토킹처벌법상에도 없는 상황"이라며 "체포와 구속에 준할 정도로 잠정조치를 (법원에서) 엄격하게 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는 피해자 보호조치 미흡으로 이어지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다?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아"
이번 사건의 경우, 경찰의 선제적 조치가 있었어야 했다는 문제제기도 힘을 얻고 있다. 경찰은 1차 고소 직후인 지난해 10월 한 달 동안 A씨에 대한 신변보호 조치를 했다. 그러나 잠정조치 신청 등은 하지 않았으며 신변보호 조치도 "피해자가 연장을 원치 않아 종료했다"는 게 경찰 측의 입장이다.
김다슬 정책팀장은 "경찰 측은 피해자가 보호조치를 원하지 않아 종료했다고 하지만, 피해자가 '원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라며 "가해자가 합의를 종용하며 협박하고 있었고, 직장 보호조치 당시 경찰이 직장 근처를 오가는 게 부담스러웠을 가능성이 높다"고 짚었다.
김 정책팀장은 "구속영장을 신청할 정도였다면 피해자를 보호하는 부분에 있어서 국가의 책임이 있는 건데, 피해자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할 수 없었다는 건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실제, 스토킹처벌법 상 피해자가 원하지 않더라도 경찰·검찰이 직권으로 잠정조치 신청이나 신변보호 연장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잠정조치 신청에 있어서도 경찰 개개인의 판단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민경 교수는 "잠정조치를 신청할지 여부가 담당 경찰관의 재량에 맡겨지고 있다. '왜 신청했냐', '왜 신청하지 않았냐'의 책임을 개인이 지고 있는 것"이라며 "모든 피해자에게 동일한 수준의 조치를 하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잠정조치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계량화된 형태로 제공되어야 현장 경찰관들 개인 책임 문제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며 피해자도 제대로 보호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