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친구와 제주도 여행 중에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곶자왈에 가봤는지 물었다. 우리가 관심을 보이자 곶자왈 중에서도 훼손되지 않은 아름다운 숲이라며 교래 휴양림을 추천했다. 곶자왈은 화산으로 인해 돌이 많은 제주도에만 있는 특별한 숲을 말한다. 숲을 이르는 '곶'과 나무, 덩굴, 암석이 뒤섞인 덤불을 뜻하는 '자왈'이 합쳐진 제주어다.
숲은 태초의 원시림같이 무성했고 고즈넉했다. 이끼로 뒤덮은 바위와 그늘에 가득한 양치류, 크고 작은 이국적인 나무들로 울창했다. 토양이 적고 돌이 많은 곶자왈에는 나무의 뿌리가 아래로 뻗지 못하고 옆으로 뻗는데, 그 모습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죽은 나무를 감고 올라간 초록 잎의 넝쿨 식물을 보니 김초엽의 소설 <지구 끝의 온실>에 나오는 갈고리 덩굴 모스바나가 생각났다. 혹시 신비로운 이 숲을 끝까지 걸어가면 모스바나를 키우던 레이첼의 온실이 나올까? 그 온실이 있었던 마을 '프림 빌리지'의 리더 지수씨를 만날 수 있을까? 두 발이 신비로운 숲속을 내딛을수록 내 마음은 점점 소설 속으로 들어갔다.
낯설지 않은 반려식물, 낯선 미래의 덩굴식물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2129년. 더스트 식물생태연구센터 연구원 아영은 폐허도시 해월에서 갈고리 덩굴식물 모스바나가 빠르게 증식하고 있다는 소식에 현장조사를 나간다. 아영은 더스트 폴 시대에 모스바나를 이용해 분해제를 만들었다는 '랑가노의 마녀들'을 만나기 위해 에티오피아로 향한다.
더스트 폴 시대는 2055년에서 2070년까지, 자가 증식하는 먼지 더스트가 세계를 휩쓸어 지구 인구의 87%를 감소시킨 대재앙을 통칭한다. 아영은 나오미로부터 그 시절 '프림 빌리지'라는 놀라운 공동체 이야기를 듣게 된다.
SF소설은 진입의 벽이 있는 문학 장르다. 미래, 우주 등의 시공간적 배경에서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SF소설이 '공상과학소설'로 잘못 번역되던 때, 학창 시절을 보낸 나는 '공상'이란 단어가 현실성 없는 허구의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구 끝의 온실> 속 '더스트 폴 시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했고, 거부감없이 빠져들게 했다. 게다가 식물이라니!
코로나가 장기화하면서 많은 사람이 식물에 관심을 가졌다. 이제 '반려 식물'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식물을 가족같이 돌보며 애정을 쏟는 사람을 '식집사'라고 일컫는다.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 초록 식물을 들여 심리적 안정과 위로를 받았다. 나 역시 올봄에 몬스테라 화분을 들였는데, 열대우림이 떠오르는 커다란 잎을 볼 때마다 잠시 남국(南國)으로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몬스테라에 알맞은 햇빛과 습도를 맞추고, 적절하게 물을 주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식물은 인간이 돌봐야 할 연약한 생명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지구 끝의 온실>은 사고의 전환점이 되었다.
식물 모스바나는 인간을 구했는가? 아니면 인간을 이용했는가?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동물을 과대평가하고 식물을 과소평가해왔다고 말한다. 대부분 피라미드형 생물관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식물과 미생물, 곤충들은 피라미드를 떠받치는 바닥일 뿐이고, 비인간 동물들이 그 위에 있고, 인간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는 생각이다.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 셈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식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언제나 지구라는 생태에 잠시 초대된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365쪽)
식물은 스스로 먹고살 것을 만들어내는 지구에서 거의 유일한 '독립영양생물'이다. 그에 반해 인간을 포함한 거의 모든 동물은 무언가를 잡아먹어야 살 수 있는 종속영양생물이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식물을 섭취하거나 풀을 먹고 사는 동물을 잡아먹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한다. 사실상 우리는 많은 부분을 식물에 의존하고 있다. 식물을 하찮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며 지구의 주인행세를 한 인간은 얼마나 오만했던가!
소설 속 식물학자 레이첼은 말한다. 식물이 인간을 구한 것이 아니라 멸망의 시대에 자신의 종족을 더 멀리 퍼트리기 위해 인간을 이용한 것일 수도 있다고. 작가는 식물의 이런 면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모스바나를 많은 식물 중에서도 타자를 휘감고 올라가는 가장 이기적인 방식인 덩굴식물로 택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단 한 발자국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식물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영토를 확보해가고, 자신의 생명을 지구 끝까지 전파하기 위해 다른 생물을 역동적으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인간이 가장 우월한 존재라는 믿음을 깰 수 있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상하 수직적 개념이 아닌 지구라는 한 집을 나눠서 쓰고 있는 수평적 의미의 이웃임을 이제야 깨달았다.
개별 '생존'에서 집단적 '공존'으로
동물의 개별성보다 식물의 집단적 고유성을 주목한 작가는 대재앙에 맞서는 인간의 방식에서도 각 개인의 생존보다 공존이라고 설파한다. 동물의 방식인 각자도생이 아닌 식물의 방식인 함께 살아남기 위한 공존은 '공동체'로 구현된다.
돔 시티에 탈출한 지수와 사이보그 인간 레이첼은 개량한 식물로 더스트 분해제를 만들어 숲을 살린다. 이 곳에 여러 연령대의 여성들이 모여 각자 맡은 일을 하며 공평하게 음식을 나눠 먹는 '프림 빌리지'는 식물 군락과 닮았다. 일정한 한 영역에서 여러 종류의 식물 집단이 종의 개별성과 단위성을 유지하며 생활하는 것을 식물 군락(plant community)이라고 한다. 이끼와 양치식물, 키가 작고 큰 나무들이 어울려 사는 숲은 대표적인 군락이다. 이 식물 공동체에 속한 식물들은 토양과 햇빛 등 한정된 환경조건에서 서로 평형을 유지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내가 4년 동안 참여하고 있는 글 모임이 생각났다. 13명이 매일 온라인으로 '하루 5문장 쓰기'를 하고 있다. 데이트 앱에서 만난 남자 이야기를 쓰는 20대부터 노후의 삶을 고민하는 퇴직한 60대까지 나이대가 다양하다. 매일 어린 아기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해야 하는 젊은 엄마와 사춘기 중고생 자녀와 스마트폰 사용시간을 놓고 전쟁을 벌이는 중년의 엄마. 다양한 삶이 녹아있는 매일 글을 쓰는 우리는 식물 군락과 닮았다.
군락 안에서 비어있는 공간과 햇빛을 향해 각자의 존재를 키워가는 다양한 종의 나무처럼 각자 처한 상황에서 치열하게 그러나 무사히 하루를 보내며 우리는 글을 쓰고 있었다. 서로의 삶을 가르치지 않고 지켜봐 주는 사람들. 앞으로도 적당한 거리 안에서 뿌리내리고 함께 삶의 영양분을 나누며 계속 성장하고 싶은 소망을 품어본다. 어떤 모임이든 한결같이 지속하기 어렵기에 더 간절하게 이 모임을 사랑하고 싶다.
씨앗이 품은 새로운 시작
안타깝게도 레이첼의 온실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프림 빌리지' 역시 완벽한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다른 대안 공동체들이 그랬던 것처럼 행복하고 평화로운 순간은 짧았다. 분노와 배신으로 공동체는 파국을 맞게 된다. 어떤 이는 소설 등장인물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을 불편해한다. 하지만 여자들만 모인 공동체가 이상향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런 지적은 무의미하다. 일상에서 잘 보이지 않는, 뒤로 물러나 있던 식물과 여성이 전진 배치되었을 뿐이다.
프림 빌리지가 무너졌을 때 공동체 사람들은 모스바나의 씨앗을 가지고 흩어진다. 그 씨앗은 전 세계에 심어져 70여 년이 지난 훗날 한국의 중소도시 해월에서 다시 모습을 들어낸다. '씨앗'은 낱알이 가진 양분만으로 아래로는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땅을 뚫고 나와 싹을 틔운다. 한시적인 유토피아였지만 공동체에서 받은 좋은 기억의 씨앗을 품고 세상으로 나간다면 아무리 디스토피아 시대라도 또 다른 희망이 싹틀 수 있다는 은유로 읽힌다.
결국 사람들은 공동 대응협의체를 통해 더스트 재앙을 극복한다. <지구 끝의 온실>은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과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작가의 말)'이었다. 지금 끝을 향해 가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역시 그렇지 않을까? 일상의 많은 변화는 예상치 못한 삶의 양식을 만들었고 우리는 또 적응해간다.
한참을 걸어 들어간 제주도 곶자왈 숲 중간에는 비바람이나 번개 같은 자연현상에 쓰러진 듯한 큰 나무가 가로질러 누워있었다. 그 나무 곁에는 다른 큰 나무 아래와는 또 다른 식물 군락지가 이뤄져 가고 있었다. 숲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숲도 우리도 그렇게 또 한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