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가 정치적 위기에 몰리거나 대국민 속임수가 필요할 때이면 어김없이 꺼낸 카드가 있다. 희생양 만들기다. 한승헌이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기 즉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정권시기에 특히 극심했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박정희의 목표는 장기집권이었다. 1967년 재선에 성공한 그는 자신이 만든 헌법에 '3선금지 조항'을 삭제하기 위해서는 같은 해 6월에 실시하는 제7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개헌선을 넘는 의석이 필요했다.
총선은 3.15 부정선거를 뺨치는 관권개입ㆍ금품수수ㆍ선심공세ㆍ향응제공ㆍ유령유권자조작ㆍ대리투표ㆍ공개투표ㆍ야당참관인 폭력행사 등이 거침없이 자행되었다. 공화당은 개헌선(117명)을 훨씬 넘는 130석을 얻고, 신민당은 44석에 불과했다. 신민당은 전면 재선거를 요구하며 등원을 거부했다.
여기에 같은 해 5월에 발생한 세칭 '복지회사건'은 권력내부에서 금기시된 후계문제가 김용태 등 친 김종필계 의원들에 의해 추진되다가 드러났다. 위기는 집권세력 내부 분란까지 겹치게 되었다. 6.8부정선거 규탄시위가 거세게 일어나자 정부는 6월 15일 전국 28개 대학과 57개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7월 3일에 1만 4000여 명의 대학생이 다시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벌이고 일부 시민들도 합세하였다. 박정희 정권 최대 위기에 내몰렸다.
중앙정보부는 7월 8일 '동백림 거점' 북괴대남 공작단사건 이라는 어마어마한 공안사건을 발표했다. 104명이 연루되었다. 구속인 중에는 서독 거주 작곡가 윤이상, 파리 거주 화가 이응로, 서울대 조교수 강빈구, 서베를린대학 박사과정 임석훈 등 다수의 예술인ㆍ유학생들이 포함되어 국내외적으로 크게 관심을 모으고 파문을 일으켰다. 구속 기소된 사람이 34명이고 한승헌은 이응로 화백 부부의 변론을 맡았다.
이화백은 6.25 때 행방불명된 아들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혈육을 만나게 해준다는 북한측 공관원의 말에 따라 동백림에 갔다가 헛걸음만 하고 돌아왔는데 뜻밖에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묶인 몸이 되었다.
그는 구치소에서의 첫 번째 변호인 접견 때 "내가 평양이 아닌 서울에 와서 이런 수모를 겪을 수가 있느냐"며 몹시 분개했다. 박정희대통령 중임 경축식에 해외에서 국위선양을 한 유공자로 초대한다기에 따라왔는데 그처럼 대통령의 이름까지 판 속임수가 더욱 괘씸하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주석 8)
정보부 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중임 경축식에 초대하는 것처럼 속여 해외유력 한인들을 귀국시켜서 법정에 세웠다.
12월 13일 오전에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재판부는 조영수(34ㆍ전외국어대 강사ㆍ정치학박사), 정규명(프랑크푸르트대학 이론물리학 연구원) 두 사람에 대하여 간첩죄 등을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였고 사형이 구형된 윤이상 씨에겐 무기징역을, 무기징역이 구형된 이응로 씨에겐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밖의 피고인들에게도 중형이 떨어졌다.
항소심 법정에서 나는 "65세 노인더러 5년 징역을 살라니 우리의 평균 수명에 비추어 무기징역과 무엇이 다르냐. 1심 판결은 사실상 검사의 구형량과 똑같은 것이어서 부당하다"고 따졌다.
그런 변론의 효험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항소심에서는 2년이 줄어든 징역 3년이 선고되었다(이화백은 구속 2년반 만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파리로 돌아갔다). (주석 9)
한승헌은 김재옥 변호사화 함께 이응로 화백의 <상고 이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피고인은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예술가로서 세계 화단에 알려진 거성이었을뿐더러 본건 소유의 발단이 또한 원 판결도 긍인한 바와 같이 아들 문세의 근황을 알고자 한 데 있을 뿐이요, 달리 본건 소위를 통하여 그밖에 또 무엇을 노렸을 리가 없었음이 분명하거늘, 그와 반대로 볼 무슨 사정이 없는 본건에 있어서 이적의 정을 알았다고 획일적으로 단정함은 일종의 억측에 상사(相似)한 추리이며, 전후가 당착되는 이유의 모순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주석 10)
주석
8> 한승헌, <분단시대의 법정>, 29쪽, 범우사, 2006.
9> 앞의 책, 30쪽.
10> <실록(1)>, 16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