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제13회 광주여성영화제 'Focus Talk' 이기는 목소리가 CGV광주금남로 1관 무대에 올랐다. 이번 행사는 '광주 연극계 권력형 성폭력 사건'에 연대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로, 영화 <백야>와 <해미를 찾아서>가 상영된 후 권김현영 여성학자, 장도국 배우, 허지은 감독이 무대에 올라 토크콘서트를 진행했다.
염문경 감독의 영화 <백야>는 연극계 원로인 연출가 박창환을 성희롱으로 고소한 젊은 희곡 작가 지혜가 갑작스러운 박창환의 사망 소식을 들은 후 겪게 되는 일들을 담은 영화다. 허지은, 이경호 감독의 영화 <해미를 찾아서>는 성폭력 가해자 백 교수의 복직에 맞서는 대책위원회가 아홉 번째 해미를 기다리는 내용을 담았다.
권김현영 여성학자는 "미투(Me too) 이후 '우리 공동체는 얼마나 변화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며 "이미 크고 작은 여러 시도를 하고 있는 곳들이 있다. 그런 곳을 상호 참조하고 연대의 정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가능한 변화의 방법일 것"이라고 했다.
이어 "얼마나를 어떻게로 바꾸고, 저쪽의 변화를 우리의 변화를 만들기 위한 참조로 인용한다면 우리는 세계를 다시 지을 수 있을 것"이라며 "미투 이후 연극계 안의 '내'가 변했다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단언할 수 있다. 내가 '우리'이고, 나도 우리도 포기하지 않는 한 미투 이후 공동체는 변화하고 있고 변화할 것이다"라고 했다.
장도국 배우는 성폭력 피해를 입은 동료가 연극계를 떠나기 직전에 작품 속에 남긴 '목소리'를 인용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말을 썼다 지웠다. 당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일이라면 덜 괴로울 것 같았다. 예쁜 애들이 없어서 술맛 안 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매표에 못생긴 애들이 서 있어서 관객이 오겠냐는 이야기를 들어도, 나는 농담으로 웃어넘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이 첨예한 논란을 일으켰다. 20대 여성인 나는 그 변화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이 싸움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적이 없었다. 부끄럽지만 불편하지 않은 여성, 예민하지 않은 여성이라는 호칭을 뿌듯하게 여기기도 했었다. 연극계 미투 논란이 있는 동안 어떤 공론장에서도 내내 침묵했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
장도국 배우는 "이 글은 광주 연극계 성폭력 사건 피해자 중 한 분이 광주를 떠나기 전 마지막 작품에서 연출을 맡았을 당시 작성한 글"이라며 "당시 피해자분은 '연출의 글'에 표현하지 못하고 있던 마음속 목소리를 남겨두었다. 지금 우리는 영영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동료들의 용기 있는 과정에 함께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피해 생존자들이 예술을 포기하고 지역을 떠나는 '견딤의 시간' 속에서 느꼈을 상실감과 자책감을 해소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치유와 회복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한다"며 "광주연극계성폭력사건해결대책위원회(대책위) 역시 이 지점을 가장 우선시하고 있다"고 했다.
장 배우는 "가해자 3인에 대한 경찰 조사가 진행 중"이라며 "가해자들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경찰이 엄중한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께서 지켜봐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했다.
지난 2012년과 2016년, 배우가 되기 위해 극단에 입단한 피해 생존자들은 극단의 대표이자 연출가인 A씨, 동료 배우 B씨, 타 극단의 대표 C씨로부터 상습적인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했다.
"내가 너를 키워줄 수 있다", "나는 네가 맘에 들어", "좋은 배역을 줄 수 있다"라는 가해자들의 말처럼, 이 사건은 평등하지 못한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성폭력 사건이었다. 가해자들은 일상의 공간에서 위계관계를 악용해 성폭력 범죄를 저질렀다.
피해 생존자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공황장애, 우울증, 대인기피 등의 증상을 겪으며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이번 사건을 공론화한 지난 6월 29일자 대책위 기자회견 직후 광주연극협회와 한국연극협회는 가해자 3인을 협회에서 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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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는 현재 우리 공동체의 구조적인 문제"
이날 행사에서는 사건 당사자 김산하(가명)씨의 목소리가 전달됐다.
장도국 배우가 대독한 입장문에서 김산하씨는 "공론화 직전 일부 관계자들로부터 '저의 의도와 다르게 향후 3년간 연극인들이 고통받게 될 것이다'는 문자를 받았다. 또한 가해자 중 한 명은 '나만 고통받으면 되는데 다른 연극인들 및 협회에 불이익이 갈 수 있다'는 문자를 보내 저를 협박했다"며 "제가 겪은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이 연극계에 피해를 준다는 말에 저는 큰 압박감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김산하씨는 "지난 5개월간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저로 인해 모두가 피해를 받고 있다는 비난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들이 말하는 '연극인들의 고통'은 누구로부터 발생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며 "피해 당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건 명확한 2차 가해이며, 우리는 이 문제를 '모두의 피해'가 아닌 '모두의 건강'을 위해 우리가 함께 견디고 겪어 내야 할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공론화를 진행한 이후에도 가해자들은 연극계 동료들에게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다. 심지어 연극계에 여전히 가해자를 조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며 "연극계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한 것이 잘 한 일인지 끊임없이 반문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이 또 다른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는 문장을 보내준 동료의 메시지를 되뇌이며 버텼다"고 했다.
김산하씨는 "제가 겪은 성폭력 피해는 과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공동체의 구조적인 문제"라며 "저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정직하게 직면했으면 한다. 또한 우리가 있는 이곳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함께 가보자고 손을 내밀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