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과 함께 한 인문학 수업의 11월 그림책은 <헨리의 자유상자>이다. 작가 엘린 레빈은 1872년 출간된 윌리엄 스틸의 <지하 철도>를 읽고 감동을 받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하 철도(Underground Railroad)'는 19세기 미국에서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북부 자유주 등으로 갈 수 있는 비밀 탈출 경로나 안전 가옥을 제공한 노예 해방을 위한 비공식 네트워크이다.
노예 반대운동을 위한 기금 조달자이기도 했던 사무엘 로즈가 만든 앤티크 석판화 <헨리 박스 브라운>에 영감을 얻었다는 카디르 넬슨이 그린 그림책 표지에는 어린 노예 헨리가 앉아 있다. 그림책은 '헨리 브라운은 노예야. 자기 나이를 모르지, 노예들에게는 생일이 없거든'이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자유를 향한 여정
자유를 찾는 흑인 노예의 이야기를 우리는 그래도 많이 접해왔다. 내 연배의 사람들이라면 어릴 적 세계 명작 동화에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 빼놓지 않고 있었고, <허클베리핀의 모험>이나, <톰 소여의 모험>같은 이야기나 만화를 통해서, 그게 아니라도 역사 시간을 통해, 혹은 영화와 같은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통해 만나봤을 터이다. <헨리의 자유상자> 역시 그런 기존의 이야기들과 같은 소재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이야기를 접근해가는 관점이 좀 다르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어른들과 함께하는 인문학 수업에서 선정한 이유이다.
<헨리의 자유상자>라는 제목에서 대놓고 '스포'를 하듯이 이 그림책은 흑인 노예 헨리가 '자유'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속 표지에, 등장하는 한 장의 그림, 나무숲 위로 펼쳐지는 파아란 하늘, 그리고 날아가는 새, 이 책의 주제를 이 한 장면으로 모두 설명해 낸다. 그런데, 그 파아란 하늘로 날아가는 새를 보는 이는 누구일까?
이 그림과 함께 한 첫 번째 질문, 그렇다면 '자유'란 무엇인가? 나의 우문에 '세상에 대한 시야가 넓어지는 게 자유'라는 현답이 돌아왔다. 어른들과 함께 한 그림책 수업의 묘미이다. '답정너'가 아니라, 하나의 그림책을 매개로 저마다 살아온 삶의 이력을 바탕으로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병중의 주인님은 헨리를 불러 말한다. '너는 좋은 일꾼이야, 헨리. 너를 내 아들에게 주겠어. ...... 복종해야 하고, 절대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헨리는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면 안 되니까. 친절하신 주인님, 하지만 헨리 엄마는 사람의 마음이 변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나무에서 떨어지는 이파리들처럼 어린 노예들이 가족들과 헤어지는 일은 예사였다. 그들은 '노예'였으니까.
아프리카에 살던 그들이 화물선 짐칸에 켜켜이 실려 쿠바니, 미국이니 건너 온 상황은 이제 인터넷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근대 유럽에서는 세계 만국의 신기한 물건들을 전시한 '만국 박람회'가 열렸는데 그곳에 전시된 품목 중에 '흑인'이 있었다. 지금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일이지만 흑인은 동등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흑인만이었을까?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 중세의 농노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결혼을 한 신부의 초야권을 영주가 가진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중세의 농노들은 '인간'이었을까? 이런 이야기를 나누자, 한 분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사극을 보면 양반집 아씨가 시집을 가면 늘 몸종이 함께 따라가곤 했는데, 이 그림책을 보니 그때 본 사극이 다른 관점에서 보인다고. 시집가는 아씨를 따라가야 하는 몸종과 이 그림책의 헨리가 무엇이 그리 다를까라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라는 개념이 확장되어 온 시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함께 나눴다. 어린 아이를 식탁에 묶어 놓았다던가, 낳자마자 유모를 따라 시골로 보내고, 유모는 귀족 집 도련님에게 젖먹이기 위해 자신이 낳은 아이를 포기해야 했다던가, 구빈원의 가난한 소년의 이야기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보여지듯 학대와 노동에 시달리던 아이들이 '어린이'로 존중받는 인간이 되는 역사 역시 지난하지 않았나.
여성은 어떨까?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 선언을 한 건 1863년이다. 그러나 정작 미국에서는 1차 대전이 끝난 1920년에 이르러서야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나라 프랑스에서는 무려 1946년에 이르러서야 법률상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었다고 한다.
흑인이든, 여성이든, 그리고 아동이든 법률적인 보장을 넘어 실질적으로 동등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권리를 위한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 면에서 <헨리의 자유 상자>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새 주인의 공장에서 일하게 된 헨리, 열심히 일을 하지만 아직 새로운 일이 익숙하지 않은 소년은 매질을 당하기도 한다. 외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주인님 심부름으로 장을 보러 나온 헨리를 낸시를 만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헨리는 두 주인님들의 허락을 얻어 결혼을 할 수 있었고, 한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운'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하루 아침에 부모님과 헤어지게 되었던 일이 헨리네 가족에게 또 닥친 것이다. 연초 공장에서 일하던 헨리는 자신의 아이들과 아내가 팔려간단 소식을 듣고도 바로 달려나갈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
그렇게 아내와 아이들을 잃은 헨리, 몇 주가 흘러 그는 결심한다. '노예가 없는 곳으로 나를 보내주세요.' 그는 스스로 박스에 들어간다. 필라델피아 행 박스는 철도로, 다시 배로, '이 면이 위쪽이니 주의하시오!'라는 말이 무색하게 짐칸에 던져지고, 위와 아래로 뒤집히고, 오른쪽 왼쪽으로 뉘어지는 등 험한 여정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에 온 걸 환영하네.' 1849년, 3월 30일, 첫 번 째 자유의 날, 드디어 헨리에게도 생일이 생겼다. 그는 이제 헨리 박스 브라운으로 거듭났다.
아내와 아이들을 잃은 아빠 노예, 그의 상황을 두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을 키운 엄마들의 입장에서, 그의 선택에 대해 여러 해석의 여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자유를 향한 여정의 첫 걸음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공감했다. 헨리가 박스를 열고 나오는 장면에서 <데미안>의 새는 스스로 알에서 깨어난다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떠올랐다고 말씀해주신 분도 계셨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 우리는 어떨까? 삶의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삶의 자유를 얻기 위해 우리 스스로 기꺼이 들어간 '박스'는 무엇일까? 삶을 제법 살아온 어른들은 모두 고개를 끄떡였다. 삶의 한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헨리가 기꺼이 스스로 박스에 들어가듯 고통스런 '박스'의 시간을 경과해야 한다는 것을. 19세기 한 흑인 노예의 고난이 이제 21세기의 우리 삶의 '화두'로 돌아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