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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택 원장과 도움을 받는 어르신 .
오금택 원장과 도움을 받는 어르신. ⓒ 최미향
  
"제 아버지는 이북 출신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다 쓸쓸히 돌아가시는 실향민들의 장례를 돕기 위해 시신처리 봉사를 아주 적극적으로 하신 분이셨어요. 제 어머니는 아버지와 같은 실향민 출신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김치를 담아주는 봉사를 하셨죠.

두 분 모두 선하고 옳은 길이었기에 한치의 게으름도 없이 그 일을 지속해서 해나가셨죠. 우리 5남매는 고스란히 부모님의 발자취를 바라보며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감히 누가 나서서 하기에 너무 힘든 일 아니었겠습니까. 세월이 흘러 어느날 하늘나라에서 두 분을 만나도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어 큰절 올릴 때까지 부모님이 가신 길을 소의 걸음으로 천 리를 가듯 뚜벅뚜벅 걸어갈 것입니다."


겨울임에도 봄 날씨 같은 지난 27일, 마음 따뜻하고 소탈한 서산시장애인보호작업장 오금택 원장을 만나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 그리고 살아온 지난 발자취를 들어봤다. 

- 지난 2005년부터 팔봉면에 거주하는 지체1급 여성장애인의 집을 방문해 머리를 잘라주고서부터 17년간 장애인 가정을 직접 방문하고 미용봉사를 해왔다. 부모님의 봉사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 토대가 된 것 같은데 부모님 얘기를 좀 더 듣고 싶다.

"부모님은 우리 5남매에게 봉사를 강조하기보다 몸소 실천하는 삶을 살아오신 분이셨다. 우리 아버님은 이북 옹진군 도원읍 출신으로 1950년에 전쟁에 휘말리면서 고향을 떠나 서산으로 피난을 나오신 실향민이다.

아버님 말씀에 의하면, 이북에서 많은 땅과 금광을 소유하셨던 할아버지였지만 (재산이) 몰수되어 국가 소유로 되는 바람에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2분만 남한으로 피난을 나오시게 되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남을 돕는 일에는 적극적이셨다. 피난 오신 후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다 돌아가신 실향민의 장례를 돕기 위하여 3일씩 장사를 때려치우고 시신처리를 해 주는 봉사를 하셨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해 갈등을 빚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하신 봉사는 남들이 감히 할 수 없는 최고의 봉사라 생각된다.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기로 소문이나 아버지와 같은 실향민 출신이 운영하는 병원에 김장 김치를 담아주는 봉사를 하셨다. 어찌 보면 두 분 다 선하고 옳은 길을 걸어오신 분이시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부모님의 '이웃을 위한 봉사정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정말 존경스럽다."
 
서산시장애인보호작업장 오금택 원장 .
서산시장애인보호작업장 오금택 원장. ⓒ 최미향
  
- 훌륭한 부모님이시다. 교육관은 어떠하셨나?

"유순하지만 상업적 수완은 좋으셨던 아버님과는 달리 어머니는 매우 엄격하셨다. 하지만 교육관은 같았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외면하지 말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고, 실향민이라 그런지 근검절약 정신을 보여주셨다. 시장에서 고추와 마늘 도매상을 주업으로 하셨고, 곡식을 소매로 사서 집 창고에 보관했다가 비쌀 즈음 대도시로 되파는 중간상을 했다. 밥 굶는 일은 없었다.

기억나는 게 있다. 천진난만하게 자랐던 국민학교 시절, 죽을 고비를 넘긴 사건이 있었다. 2학년 때인가. 학교에 가려면 교량을 건너야 했다. 마침 시멘트 교량으로 개량하려고 기존 나무 교량을 철거한 상태라서 옆으로 돌다리가 놓여있는 걸 발견했다.

마침 비가 많이 온 오후였는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다리를 건너다 그만 물에 휩쓸려 약 2km까지 떠내려가는 큰일을 겪었다. 죽음이 눈앞에 닥칠 즈음에 하천 아래쪽에 큰 돌이 있어 그것을 잡고 살았다.

책보자기를 어깨에 멘 상태에서 겨우 살아서 집으로 들어가니 어머니가 나를 보곤 깜짝 놀라 달려오셨다. 책은 이미 다 젖은 상태였고, 신고 다니던 신발조차 없어진 것을 보며 '살아와서 고맙구나'라며 한참을 안고 우셨다."
 
장애인 댁을 찾아 봉사를 하고 있는 모습 .
장애인 댁을 찾아 봉사를 하고 있는 모습. ⓒ 최미향
   
- 살면서 가장 슬픈 기억이 바로 어머니의 투병과 임종이라고 하셨다.

"내 나이 22살 때 54세 우리 어머니가 숨을 거두셨다. 꽃다운 나이에 가신 어머니는 열여섯살 막내 여동생을 두고 어찌 눈을 감았을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어느날 갑자기 소화가 안 된다는 어머니는 인근 병원에 가셨고, 의사 선생님은 당장 큰 병원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래도 서울에는 실력 있는 의사와 장비가 있으니 괜찮을 줄 알았다.

그곳에서는 '위궤양이 심하여 위출혈이 악화됐다'며 '한 달간 입원 치료를 받으면 된다'는 말을 하셨다. 의사의 말을 듣고 치료를 받아오던 중 치료비가 워낙 비싸다 보니 집을 팔게 되자 어머니는 극구 서산으로 내려와 치료를 받겠다고 하셨다.

나중에 보니 어머니의 병명은 위암이었다. 6개월을 버티지 못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하늘이 노래졌던 그 시절, 나는 그길로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 다니며 사랑하는 내 어머니의 병이 완쾌되기를 기도하고 기도했다. 매일 어머니를 부축하면서 새벽기도를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신앙의 힘으로 버티던 우리 어머니는 1년을 견디시다 돌아가셨다. 형님이 군대에 있던 관계로 내가 직접 어머니의 임종을 맞아야 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늦깎이로 딴 복지사 자격증... 복지관장 소개로 봉사 시작하게 돼"  

- 늦은 나이에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사연이 있다고 들었는데.

"가장 기뻤던 일이 바로 늦깎이 사회복지사 자격증취득이다. 사연이 있다. 한때 장애인복지관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당시 인사위원회에서 '사회복지사 일을 하라'는 권고를 받고 관내 장애인 직업재활반을 운영하게 됐다.

그때 몇몇 사람에 의해 '사무원이 사회복지사 일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라는 악의성 글이 서산시청 게시판에 게재되고 신문에 보도됐다. 본의 아니게 했지만, 상당히 괴로웠다. 그 당시 사표를 낼까 생각하다 오기가 발동하면서 야간대학 문을 두드렸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받으며 '자격증에 부끄럽지 않도록 정말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 봉사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 봉사를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2005년경 장애인복지관에서 근무하면서 관장님이 '팔봉면 진장리에 사는 여성장애인이 바깥을 나가지 못하여 머리 손질에 어려움이 많다. 미용 봉사를 해 주면 어떻겠는가?'라는 부탁을 받았다. 딱한 사정을 듣고 미용사인 아내와 함께 그 집을 방문했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얼굴은 하늘을 향해 있고 다리는 걷지 못하여 25세가 되도록 집안에서 천장만 바라보며 사는 장애인이었다. 당황스럽고 충격을 받았다. 아내도 아마 속울음을 삼켰을 것이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머리를 깎아주게 된 게 지금까지 재가방문 이·미용 봉사를 해 오고 있다.

이런 일을 하면서 건너건너 지켜본 장애인 사망이 약 30명이 넘는다. 장애인은 신체적,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일 거라 생각된다."
  
재가방문 이·미용 봉사를 하고 있는 오금택 원장과 가족 .
재가방문 이·미용 봉사를 하고 있는 오금택 원장과 가족. ⓒ 최미향
 
- 봉사를 하면서 장애인들의 여러 마지막을 봤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이가 있다면.

"2012년대 초였다. 당시 해미에 사시는 시각장애인 배씨 할아버지가 3년간 이·미용서비스를 받아왔다. 일요일 그날도 우리 가족 모두가 11시경 할아버지 댁으로 미용 봉사를 하러 갔었다. 그런데 평소와 같지 않게 할머니가 왔다 갔다 하시면서 당황해하는 것 같아 이상하다 생각했다. 일단 급하게 방으로 들어가 보니 할아버지가 임종 직전이었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밤에 개가 심하게 짖어 귀신이 왔다는 직감을 했다는데, 아침에 갑자기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하더니 우리가 도착할 때쯤 운명한 것이었다. 아내와 아들딸은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 서산의료원에 전화하여 시신 운구를 부탁해 놓고 우리는 다른 대상자 집에 가서 머리를 깎았다.

마음이 착잡했다. 돌아오면서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우리 가족들에게 축복받기를 원하셨을 것'이라는 내 말에 아내는 '힘들어도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위해 머리 깎아주는 일은 손 놓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 현재 서산시장애인보호작업장 원장직을 맡고 계신다. 직업재활이 녹록지 않을 텐데?

"맞다. 장애인 직업재활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고 쉽지가 않다. 장애인 1명을 직업재활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나는 장애인복지관에서 사무원으로 있으면서 직업 재활반 친구 20명을 데리고 직업 재활에 힘쓴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정책적으로 장애인생산품 우선구매 여건이 개선되어야 장애인 일자리가 보장된다.

지난해 개관 이래 처음으로 8억7백만 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년 대비 200%의 실적이다. 그리고 장애인 근로자와 훈련생들에게 성과급을 지급했다. 충남에서 처음 시도하게 된 것이다. 성과급 지급이라는 획기적인 제도에 대하여 평가를 나온 교수들도 좋은 호응과 반응을 보였다.

우리는 기업형 사회복지사업체이다. 기업은 이윤이 남으면 기업주만 챙기는 게 아니라 근로자에게도 돌아가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 좋은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근로자를 대우하고 남는 이윤을 함께 나누는 길 만이 서로의 신뢰를 쌓고 성장해 나가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어르신댁을 찾은 오금택 원장 .
어르신댁을 찾은 오금택 원장. ⓒ 최미향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없다. 다만 타인을 위해 봉사해 오신 부모님의 정신을 물려받았다. 어렵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지체없이 달려가 손을 잡아 주는 것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깍 듯 자기의 어려움을 선뜻 남에게 알리지 못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그러기에 퇴직 후에도 선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아름다운 봉사단체'를 설립하여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을 발굴하고 사례 관리하며, 우리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게 꿈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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