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고조선유적답사회장 안동립씨와 함께 서길수 교수가 운영하는 고구려연구소를 방문해 담소를 나누다 서길수 교수(79)가 주최했던 '살아서 하는 장례식' 이야기를 들었다.
서길수 교수가 주최한 '살아서 하는 장례식'은 2022년 12월 17일에 열려 80명(가족 30명, 지인 50명)만 초대받았다. 당시 안동립씨가 "존경하는 교수님"의 초청장이라며 메시지를 보냈지만 일면식이 없는 필자는 그저 마음뿐이었다. 다행히 13일 저녁 고조선유적답사회 안동립 회장이 곧 출판할 예정인 <독도> 화보집 편집위원회의가 열려 다음날인 14일 서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고구려' 아닌 '고구리'라고 주장하다
전남 화순이 고향인 서길수 교수는 단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경대학교에서 30년 넘게 경제사를 강의하며 (사)고구리연구회를 창립하여 30년간 고구리 연구에 힘썼다. 포용적인 마음을 지닌 그는 세계에스페란토협회 임원을 맡아 140개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고구려를 왜 고구리라고 부릅니까?"라고 묻자, "'고구려'가 아닌 '고구리'여야 한다"고 설명한 그는 "옥편에 보면 '려(麗)를 나라이름 '리'로 읽어라'라고 씌어 있으며 용비어천가에도 '리'로 읽어라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했다.
서교수는 <고구리 축성법 연구> <백두산 국경 연구> <동북공정 고구리사>(번역) <엄두를 낸 것은 할 수 있다>(수필집) 등 30권의 책을 출판했다. 역사 연구에 매력을 느껴 고구리사 논문 80편을 쓴 그는 최근 불교에 심취해 <정토와 선>, <극락과 정토선>, <극락 가는 사람들>등의 불교 서적을 출판하고 있다.
'살아서 하는 장례식'에 초대하기 위해 서교수가 쓴 '모시는 글'을 읽어보면 그가 왜 살아서 장례식을 주최했는지가 잘 드러나 있다. 40년 전인 1983년부터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던 화두는 "나는 죽어서 어디로 가나?"였다.
"1980년 본격적으로 수행을 시작할 때 선지식에 처음 물었던 질문도 '선생님은 죽음이 두렵습니까?'였고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8년간 치열하게 공부했습니다. 제가 '죽음'에 대해 뚜렷한 답을 얻은 것은 2009년 정년퇴임하고 산사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하면서 인류 최대의 스승을 만난 뒤였습니다.
사꺄무니 붇다는 나고 죽는 괴로움을 완전히 여의는 유일한 길은 근기가 높은 사람은 생전에 위 없는 깨달음 얻는 것이고, 얕은 사람은 안전한 극락에 가서 계속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인뿐만 아니라 가족과도 연락을 끊으며 3년 동안 참선하면서 얻은 결론은 '위 없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현재 같은 끝판 세상에서 100만 명에 1명도 어렵다는 점을 깨닫고 극락에 가서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한 서길수 교수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책으로 펴냈다.
깨달음에 이르러 그가 찾아낸 3가지 경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 <모든 붇다가 보살피는 아미따경>이다. 내친 김에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미 극락에 간 사람들을 찾아서 10년 만에 펴낸 책이 <극락 간 사람들>이다.
"연명치료 하지 말고 절대로 울지 말아라"
서길수교수가 티벳 속담이 담긴 경귀를 보여줬다.
"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울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은 웃고 즐거워 하였다. 내가 내 몸을 떠날 때 나는 웃었고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울고 괴로워하였다."
"태어나는 것은 내 맘대로 못했지만 죽는건 내 맘대로 하고 싶어 지인뿐만 아니라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절에서 3년 동안 참선하고 지냈다"라고 얘기해 "무슨 지병이라도 있었습니까?"라고 묻자 답변이 돌아왔다.
"사람의 삶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철이 있어요. 봄에는 학교 다니며 공부할 때이고 여름에는 직업을 가지고 활동할 때입니다. 가을에는 열심히 활동해 성공하고 거두는 때이며 겨울은 거둔 것을 나누고(回向) 죽음을 준비할 때(宗教)입니다. 잘 죽는 것이 더 중요하며 철학이 끝나는 곳에 종교가 시작된다는 철학자 하이데커의 말을 좋아합니다. 이걸 모르는 걸 '철부지(철不知)'라고 합니다."
그가 늘 마음속에 죽음을 새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 날, 자식들에게 남길 유언을 준비하면서 장례식을 생각했다. 죽음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살아서 하는 장례식'을 하기로 결심했다.
"죽은 뒤 찾아오는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죽어서 누가 오는지도 모르는 장례식보다는 내가 살아서 조문 온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고 가는 장례식이 좋겠다. 그러려면 장례식을 살아서 해야겠다. 그 대신 죽을 때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부고없이) 조용히 간다."
서교수는 책을 출판할 때마다 장례식 대신하는 출판기념회를 하고 싶어한다. "죽기 전까지 몇 번이나 자신의 장례식을 치를 것인지가 궁금하다"는 그가 제작한 영상물에 수록된 글이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연명치료를 하지 말고 가능한 집에서 세상을 떠나게 한다. 숨을 거두면 장례식을 하지 말고 화장터와 연락이 되는 대로 가능한 빨리 화장한다. 될 수 있으면 24시간 안에 하되 주검은 이른 아침이나 저녁에 조용히 떠나는 것이 좋다. 절대로 울지 말아라. 울어서 가는 길 막지 말고, 극락 가는 것을 믿고 기뻐하라. 만일 슬픔이 오면, 왜 슬퍼하는 지 자신을 돌아본다."
서교수는 장례식장에 참석하는 사람들 점심까지 대접하고 조의금뿐만 아니라 꽃다발도 사양했다. 꽃다발 사양은 꽃 하나라도 꺾지말라는 그의 생명 존중 사상 때문이다. 다만 그날 사는 책값만 각자 냈다. 책을 선물해주시길래 책값을 내겠다고 했더니 책의 맨 뒷장을 보여주신다.
"책값 100원은 고구리 연구소에서 부담합니다. 이 책의 저작권은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이 책의 일부 또는 전부를 옮겨쓸 수 있습니다. 다만 꼭 출처를 밝혀주십시오."
'나누고 가시겠다!'는 서교수의 깊은 뜻을 음미하며 연구소를 나서는 내 발걸음이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