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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에서 그는 언제나 '태풍의 눈'이었다.

야권 일각이 중앙정보부의 공작에 말려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의 이른바 '사쿠라'가 판치는 정치판에서 그는 남달랐다. 한일굴욕회담과 베트남 파병을 둘러싸고 그는 선명한 반대투쟁의 맹장이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강직한 성품으로 비록 군소정당이나 무소속의 소수파 신분이었으나, 그의 발언과 투쟁은 정부여당을 긴장시키고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며 무기력한 야당을 분발시켰다.

이승만에 이어 박정희와 격렬하게 대척점에 서게 되면서 정치자금의 파이프라인이 동결되고, 그로 인해 조직을 이끌 수 없었다. 해서 독립운동과 반독재 투쟁의 화려한 경력과,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과 언변 등 정치인으로서 모든 조건을 갖추고도 야당의 '실력자'가 되지 못한 것은 그 개인은 물론 한국정치의 큰 손실이었다. 

헌정 80년이 되어가는 한국정치사에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갖고 정치활동을 한 정치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4, 5선 이상의 다선의원 출신도 적지 않지만, 대부분이 헌정사에 남을 그리고 국정의 민주화와 국민복지, 민족통일에 대한 경륜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는 1960년대 초기, 군사독재의 살벌한 반공체제에서도 시세에 영합하지 않고 민주사회주의 이념을 제시하였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모순, 병폐를 지양하는 그리고 두 체제의 긍정적인 분야를 수렴발전하자는 체제였다. 1951년의 프랑크푸르트선언과 1962년의 오슬로선언을 소개하면서 공산독재와 자본독점체제를 함께 비판하였다.

19세기 이후 자본주의 아래서 형성되어온 빈곤, 실업, 불평등을 극복하고 사회보장, 완전고용, 경제성장, 소득과 이윤분배의 공정성을 실현하는 경제적 민주화를 추구하며 나아가서 권력의 전제독재화로부터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수호함으로써 정치적 민주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주석 1)

지난 18대 대선 당시 여야 후보가 한결같이 선거의 핵심공약으로 내건 '경제민주화'는 50여 년 전에 서민호가 제시한 것이다. 반세기 앞선 선견지명을 찾을 수 있다. 오늘의 '경제민주화' 정책의 저작권은 서민호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다음의 주장을 들으면 현재성을 느끼게 된다. 

민주사회주의야말로 민주주의의 정확한 것이며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지금까지의 제도 가운데서는 최상의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반공과 멸공에도 최선의 책(策)이 되는 것이다. 영국노동당의 러스키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권력분산 뿐만 아니라 마땅히 부의 분산도 동반해야 된다고 갈파했으며, 역시 영국 노동당의 스트렐러는 <현대와 자본주의>라는 그의 저서에서 "우리가 할 일은 자본주의부터 구성하되 민주사회주의와 공존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필요하다"고 역설, "만일 공존할 수 있는 민주사회가 무시된다면 마르크스에 의하여 지적된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론이 적중될 지도 모르기 때문에 민주사회주의의 존립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 이라고 지적했다. (주석 2)

그는 민주사회주의만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 인간의 생존권과 인격, 자유를 존중하며 자주자립, 자존을 토대로 한 삶의 향상을 추구하는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내다보았다. 하지만 낡은 자본주의이론과 반공논리로 여야 보수정치인들과 무지한 군사독재 정권은 선각적 정치지도자의 혜안을 수용하기는커녕, 걸핏하면 국가보안법으로 묶어 그의 이념과 활동을 차단시켰다. 

서민호는 민주사회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혁신정당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국제사회의 변화 추세와 남북통일문제, 소외 계층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보수 양당제로는 불가능하다는 정치적 신념이었다. 하여 1966년 4월 13일 민주사회당(민사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같은 달 27일 민사당 창당준비확대대회에서 창당 발기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자 정부의 탄압이 따랐다. 이승만 정권 때 조봉암이 진보당의 창당을 준비하자 간첩혐의로 구속했듯이, 박정희 정권은 서민호의 민사당 창당을 초반부터 막았다. 평화통일문제와 베트남 파병 관련 발언이 반공법 위반이란 혐의로 그를 구속한 것이다. 다음은 공소장에 나타난 서민호의 베트남 파병에 대한 비판 성명서의 요지다.

박정희 정권은 민족의 고귀한 피를 진흙탕과 정글의 땅 죽음의 나라 월남으로 헐값으로 팔아넘기고 있다. 우리는 1개 정파의 정권유지와 내외 상인의 자본축적 수법으로 이땅의 숭고한 젊은 피를 전쟁의 제물로 바칠 수는 없다. 

우리는 쓰러져가는 월남의 피투성이 전선을 담당할 하등의 의무를 진 것이 아니다. 미국이 우리 전선을 담당하고 우리가 월남 전쟁을 대리 수행한다는 것은 천만 부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이 박정희 정권의 반민족적 처사를 단호히 규탄하며 비상식적인 용병정책에 엄중 항의함과 동시에 월남 증파를 단호히 저지하고, 이미 파병된 국군의 송환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월남증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의하며, 전체 애국적인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간단없는 성원을 간곡히 호소한다. (주석 3)

검찰이 6월 3일 서민호를 남북서신·기자교류 주장 및 조총련계 자금 수수 등 혐의로 구속했으나 88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일제강점기와, 이승만 정권에 이어 박정희 정권에서까지 잇따른 구속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긴 옥살이는 면할 수 있었다. 이슈가 민감하여 논란이 확산될수록 정부에 불리하다는 인식때문이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혁신정당의 창당에 나섰다. 1966년 12월 22일 혁신계 인사들과 민사당  창당대회를 갖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날 서민호는 통일운동사에 기록될만한 중요한 연설을 하였다. 

남북서신교환과 기자교류, 문화인교류 등 남북간의 부분적 교류를 제안하고, 며칠 뒤 열린 창당준비 확대대회에서는 한일기본조약의 폐기와 주월 한국군의 철수를 주장했다. 이어서 "내가 만약 집권한다면 북한의 김일성과 국제기구를 통하거나 해서 면담,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하였다. 당시 정국에서는 아무나 하기 어려운 '폭탄선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주일 뒤 서민호를 다시 반공법위반혐의로 구속했다. 재판에 넘겨져, 남북교류론과 베트남 파병반대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인정했으나, 김일성 면담 부분은 "반국가단체의 수괴를 자신과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림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괴를 합법 정부인 대한민국과 동등하게 취급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인정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서울형사지법은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했다. 고법에서는 무죄가 선고되어, 정치적으로 묶으려했던 박정희 정권의 의도는 무산되었다. 

서민호는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반민족·반통일 노선을 지켜보면서 이를 시정하기 위해 자신이 집권하겠다는 꿈을 가졌다. 민사당을 대중당으로 확대개편하고 진보적인 정책을  제시했다. 보수야당의 정책과는 차이가 많았다. 1950년대 말기 진보당 조봉암의 혁신적인 정책 이래 처음이었다.

서민호는 1967년 5월 3일 실시되는 제6대 대통령선거에 대중당의 후보로 지명되었다. 보수야당의 윤보선 후보로는 승산이 없다고 보았기에 이를 수락하였다. 혁신정책을 제시하고 정책대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국민은 야권후보 단일화를 염원했다. 이를 위해 후보를 사퇴하고, 신민당과 함께 공명선거투쟁위원회를 결성, 위원장을 맡아서 윤보선의 당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박정희를 꺾지 못했다. 선거유세에서 국방비를 줄여 민생을 살리고, 남북의 군축을 제의하겠다는 발언으로 5월 8일 구속되었다. 반공법위반 혐의였다. 박정권에서만 세 번째 구속이었다. 5월 27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주석
1> 서민호, <이래서 되겠는가>, 253쪽.
2> 앞의 책, 254쪽.
3> 오소백 편, <해방 20년>, 765쪽, 세문사, 1966.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서민호#월파_서민호평전#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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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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