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 안식년을 갖겠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놓고 무얼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고민이 많다. 잘 놀아야 하는데, 의미있는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나를 위한 시간이어야 하는데... 안식년에 온갖 의미를 끌어다 붙여놓고 아직까지 시작한 건 아무것도 없다. 언제 한 번 제대로 놀아봤어야지, 노는 것도 어렵다.
혼자 밥 먹기, 혼자 영화보기, 혼자 여행하기... 남들은 무언가를 혼자서 하는 게 참 쉬운 모양이다. 늘 '혼자'만의 시간을 바라며 27년을 '세트'로 살아온 나에게는 뭐 하나 만만한 게 없다. 부부생활의 모토가 '당신이 뭘 해도 좋아. 나만 안 건드리면!'인 남편에게 같이 놀자고 해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뻔할 테고, 보란듯이 나 혼자 재미나게 놀고 싶지만 혼자 노는 게 쉽지 않다.
'나 혼자 산다'는 사람들의 화려한 싱글라이프를 부러워하며 애꿎은 나이 탓만 하지만 사실 혼자서 밥 한끼도 제대로 사먹지 못하는 주변머리가 문제다. 볼 일이 있어 밖에 나갔다가 식사 때가 되어도 웬만해서는 혼자서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다.
4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아 밥을 먹으려면 다른 손님들이 모두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 영 불편하다. 차라리 늦더라도 집에 돌아와 마음편히 라면을 끓여먹는 게 훨씬 낫다. 어쩔 수 없이 혼자 밥을 먹어야 할 때도 패스트푸드점의 창가 자리에 앉아 햄버거 하나를 얼른 먹고 나온다.
혼자 영화보기는 그래도 좀 낫다. 육아에 지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무작정 밖으로 나가 영화관에 들어갔었다. 그때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불 꺼진 영화관에서 한참을 울다 나왔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 이후로는 종종 혼자서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극장에 혼자 앉아있는 게 쑥스러워 일부러 통로쪽 가장자리에만 앉았는데 지금은 점점 영화가 잘 보이는 가운데 자리로 옮겨가고 있는 중이다. 여전히 주변이 신경 쓰여 빨리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지만 그래도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조금은 생긴 것 같다.
안식년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은 '혼자 여행을 가는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혼자' 하고 싶어할까? 나이가 차서 혼자인 게 눈치보여 결혼을 했고, 결혼해서 둘만 있는 게 또 눈치보여 아이를 낳았고, 25년 동안 내 이름 대신에 ㅇㅇ엄마로 불리며 나와 아이들은 항상 한몸이었다. 물론 간간히 파트타임 일을 할 때면 내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했지만, 나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는 ㅇㅇ엄마였고, 나도 그렇게 불리는 게 훨씬 편했다.
영원히 ㅇㅇ엄마일 것만 같던 내 인생에서 어느새 아이들은 자신의 인생을 찾아 떨어져 나가고 있다. 나의 보호가 더 이상 보호가 아닌 간섭이 되고 있음을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일깨워주고 있다. 반면, 아이들을 키우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부모님은 어느새 내 보호를 원하고 계신다.
자식들과 함께 해외여행을 다녀 온 고모네 식구들 이야기를 들을 때면, 봄 벚꽃이 만발하고 울긋불긋한 가을 단풍이 가득한 TV 화면을 부모님과 함께 보고 있을 때면 괜시리 고개가 숙여진다. 아이들을 보면서 이제는 혼자 놀아야 함을, 부모님을 보면서 나이 들어서도 혼자 놀 수 있어야 함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나는 더 늦기전에 혼자 여행을 하고 싶다. 혼자 노는 연습을 해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혼자 밥 먹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혼자 하는 여행을 꿈꾸고 있으니 여전히 나의 안식년이 그저 꿈으로만 끝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다.
그래도 몇 해 전부터 시작한 매일 아침 혼자 걷기는 혼자 여행의 워밍업이 되고 있다. 늘어가는 뱃살과 올라가는 혈압을 잡아보려고 앞만 보고 열심히 걸었던 '운동'이, 이제는 점점 나무도 보이고 새소리도 들리는 행복한 '휴식'이 되어가고 있다.
같이 놀아주지 않는 가족들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놀지 못하도록 막는 코로나 때문에 시작하게 된 걷기이지만 그 덕분에 혼자서도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작은 용기와 체력이 생겼다.
역시나 혼자 노는 것도 미리 준비와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성공적인 주부 안식년을 위한 혼자놀기 연습으로 내일은 혼자서 식당에 들어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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