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려한 경관은 도시의 매력 요소 중 하나다. 부산은 바다, 강, 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다. 특히 부산 바다는 사시사철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은다. 우리 부부가 휴가지를 부산으로 정한 이유도 겨울바다 때문이었다. 겨울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만약 부산에 바다가 사라진다면, 그래도 여전히 부산은 아름다울까? 바다가 없는 부산 즐기기. 상상이 되는가? 이 글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 두 개의 거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망미골목과 전포동공구길이다.
커피와 책이 어울리는 한적한 분위기, 망미골목
먼저 망미골목은 비건들 사이에는 이미 유명하다. 비건 베이커리 '꽃사미로'가 있기 때문이다. 망미골목은 소상공인들이 꾸민 개성 있는 골목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고가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저층 주거지와 소상공인의 상업 공간들이 자리 잡고 있다. 분위기 좋은 카페와 공방, 식당들이 군데군데 숨어 있다. 시끌벅적한 관광지가 아닌 한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혹시 망미골목을 들를 예정이라면, 비온후책방에 가장 먼저 들러볼 것을 권한다. 비온후책방은 책을 판매하는 동네서점이다. 부산의 로컬 이야기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도서출판 비온후'를 운영하기도 한다. 여행을 하며 부산만의 고유한 문화를 소개하는 자료나 책을 구하던 차였는데, 이곳에서 <부산에서 살지만>이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망미골목을 소개하는 지도도 구할 수 있다. 포털사이트가 안내해 주는 여행은 내심 의심스러웠는데 로컬이 직접 제작한 지도는 왠지 모르게 믿음직스러웠다.
망미골목에 방문한다면 F1963이라는 복합문화공간에도 들러볼 것을 추천한다. F1963 복합문화공간에는 중고서점, 카페, 갤러리, 음식점, 화원, 예술전문도서관이 있다. F1963이라는 이름은 Factory의 F와 고려제강 수영공장 창립연도 1963년에서 따왔다.
F1963 공간의 테마는 재생과 친환경이다. F1963은 부산 고려제강의 터였다. 와이어를 생산하던 공장이 예술문화의 장으로 변모했다. F1963 옆에는 대나무 숲 소리길이 조성되어 있다. 아파트 단지 사이에 복합문화공간과 대나무 숲길이라니.
다행히도 F1963은 방문객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다. 물론 내부 음식점이나 카페는 상업공간이긴 하지만, 예스24 중고서점과 대나무 소리 숲길은 별도로 지불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다. 기업에서 운영하고 조성한 공간이지만 어느 정도 공공성이 확보됐다는 점에서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발란사가 있는 로컬 문화 중심지 '전포동공구길'
다음은 전포동공구길이다. 부산에서 딱 하나의 거리만을 추천해야 한다면 바로 이곳을 추천한다. 서면역과 부전역 사이에 있다. 함께 여행한 아내는 서울의 문래동이 떠오른다고 했다. 필자는 서울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분위기를 느꼈다.
사실 부산 로컬 편집숍이자 브랜드인 '발란사'가 아니었다면 전포동공구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우리 부부가 전포동공구길에 방문한 이유는 순전히 발란사 때문이었다.
발란사는 2008년에 수입 빈티지 의류를 판매하는 편집숍으로 시작했다. 올해로 15년 차가 된 부산의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수입 빈티지 의류뿐만 아니라 패션 양말, 컵을 비롯한 소품까지 판매한다. 사운드숍 티셔츠를 비롯해 스웨트셔츠와 같은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의류와 모자를 직접 제작하여 판매하기도 한다. 필자가 발란사를 매력적으로 느꼈던 이유도 사운드숍 발란사라는 짧은 문구가 새겨진 스웨트셔츠와 모자 때문이었다.
발란사는 패션계 '콜라보의 제왕'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나이키, 뉴발란스 등 대형 스포츠 브랜드뿐만 아니라 각종 스트릿 패션 브랜드와도 협업하여 의류를 제작하는 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1949년에 생긴 부산의 브랜드 송월타월과 협업하기도 했다.
패션 의류 브랜드뿐만 아니라 타월 브랜드에서까지 발란사에게 손을 내미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발란사가 갖고 있는 고유한 매력 때문 아닐까? 발란사의 매력에 이끌려 전포동공구길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전포동공구길에는 발란사 외에도 젊은 세대의 눈을 사로잡는 의류 편집숍들이 보인다. 갤러리도 있고 개성 있는 분위기의 카페와 술집도 여럿 보인다. 줄 서서 기다리는 맛집과 디저트숍도 있다. 추운 날씨에도 줄 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알지 않는가. 전포동공구길은 부산 로컬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포동공구길 '걷는 재미'도 매력 포인트
게다가 전포동공구길은 '걷는 재미'가 있는 거리다. 오래된 건축물의 공간들이 작게 나뉘어 있는데 개성 있는 소규모 상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아기자기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다닥다닥 조화롭게 붙어 있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다. 마음에 드는 상점을 보물찾기 하듯 둘러보다 보면 들어가서 구경도 하고 돈도 쓰게 된다. 필자도 비건 디저트숍 '뭉구점 베이커리'에 들러서 씨앗 호떡 쿠키와 흑임자 찰떡 쿠키를 구매했다.
걷는 재미에는 안전한 보행환경도 한몫한다. 전포공구길에 차가 쌩쌩 달린다고 상상해 보라. 보행자가 서 있다고 경적을 울린다고 상상해 보라. 전포공구길은 결코 걷기 좋은 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포공구길은 차도와 보행로가 별도로 구분되지 않았다. 차량 한 대만 통과할만한 너비의 일차선 도로다. 하지만 도로는 보행자우선도로로 지정되어 보행자에게 우선권이 있다.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기 때문에 어린이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고 30km/h로 속도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걷기 편안한 보행환경이 조성되었다.
부산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문화적 도시재생의 대표 사례
망미골목과 전포동공구길의 공통점은 민간영역에서 자생한 문화적 도시재생 지역이라는 점이다. 거리가 매력 있는 상점들 덕분에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 과정은 지자체나 중앙정부의 특별한 지원 없이 진행되었다. 두 거리 모두 매력 있는 상점의 '후광 효과'를 누리고 있다. 매력 있는 상점은 소비자의 발걸음도 이끌지만 다른 상점이 들어오게 되는 계기도 된다.
전포동공구길은 원래 공구상가 거리였지만 공가(空家)에 개인이 운영하는 카페가 하나둘 들어서면서 카페거리로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지금은 공구상점, 공구수리점과 의류 편집숍, 카페, 음식점이 공존하는 신기한 동네가 되었다.
망미골목도 마찬가지다. 포털사이트 로드뷰를 보면, 2017년만 해도 평범한 주거지역으로 보인다. 하지만 2019년 정도 되자 하나둘씩 카페와 책방, 공방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F1963도 들어서면서 책과 쉼이 어울리는 동네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비온후책방을 포함해 세 개의 책방을 중심으로 망미동 특유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어떤 상점이 두 개의 거리에 가장 먼저 자리 잡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렇게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면서 거리가 매력적으로 변화했고, 발란사와 꽃사미로 같은 상점이 탄생한 것이다.
필자가 두 개의 거리를 방문한 이유는 매력 있는 특정 상점을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발란사' 때문에 전포공구길에 방문했고 '꽃사미로' 때문에 망미골목에 방문했다. 상점에 방문했다가 인근 다른 상점들도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소비했다. 이번 부산 여행을 통해 바다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인 부산의 새로운 거리를 발견했다. 두 거리는 부산의 수많은 아름다운 거리 중 일부에 지날지도 모른다. 부산 곳곳에 이런 거리가 숨어있을지도.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 계정(@rulerstic)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