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송파 세 모녀 사망사건, 2019년 성북 네 모녀 사건, 2022년 수원 세 모녀 사망사건. 만성질환이나 생활고 끝에 일가족이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들이다. 그때마다 정부는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겠다고 다짐했지만, 되풀이 되는 비극을 막지는 못했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어 가족이 함께 목숨을 끊는 선택 아닌 선택을 하는 이 사태를, 그들의 개인적 불운을 안타까워하거나 복지제도의 부족을 탓하는 걸 넘어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 즉 인권의 침해라고 규정하고 인권의 관점에서 대책을 마련할 수는 없을까?
우리 헌법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헌법의 최고 근본원리로 두고 그 실현을 위한 여러 기본적 권리들을 규정하고 있지만, 여기에 돌봄을 받을 권리나 돌볼 권리는 없다. 헌법에 직접 규정되어 있지 않더라도 헌법 해석을 통해 새로운 기본권을 도출해낼 수도 있지만 아직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에서 돌봄을 기본권으로 인정한 사례는 없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하고 인권연구소 '창'의 연구활동가인 김영옥·류은숙이 공저한 <돌봄과 인권>은 돌봄을 인권으로 연결해 함께 사유함으로써 인권의 문법을 돌봄으로 새로 쓰려는 시도이다.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 "돌봄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집단 소망"을 조직하는 데 충실한 몫을 하기를 희망한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생명권은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인간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헌법에 규정된 모든 기본권의 전제'라고 본다. 한편 돌봄은 "생명을 유지하고 인격을 형성하는 조건이자 가치이며, 정치사회의 생물학적 밑거름을 제공하며 정치공동체에 유대라는 필수불가결한 자양분을 제공하는 선결적이고 실천적인 가치"이다.
따라서 돌봄을 받을 권리도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인간존재의 근원'이 되고, '헌법에 규정된 모든 기본권의 전제'가 될 수 있다(김희강, '돌봄: 헌법적 가치', <한국사회정책> 제25권 제2호).
다만 이 책의 저자들은 돌봄을 받을 권리의 헌법적 근거를 찾는 해석론보다는 돌봄을 인권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 돌봄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구체적 질문, 돌봄권이 실천되는 모습에 더 주안점을 두고 분석한다. 돌봄권은 익숙한 "권리의 문법을 바꾸려는 시도"이기에 "인간 존재의 본질을 재확인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존엄하기에 인권을 지닌다. 전통적인 인권론이나 철학에서는 인간이 존엄한 이유를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에서 찾는다. 이런 입장에서는 지적 장애인이나 '쇠락하고 돌봄 받는 몸'을 알지 못하고, 독립성과 자율성을 타인과 무관한 개인의 능력으로만 여긴다. 그러나 저자들은 마사 누스바움의 '역량'을 돌봄의 관점에서 적용하고 이해함으로써 독립성과 자율성, 인간 존엄성을 새롭게 검토하고자 한다.
누스바움이 말한 역량이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의 보장, 가능성이 있는 희망', '세상에 잘 존재하기 위해 사람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따라 행위하고 존재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를 뜻한다.
역량은 개인의 능력이 아닌 개인이 놓인 사회적 환경을 복합적으로 사유하도록 이끌고, 능력이 아니라 역량의 관점에서 권리를 살필 때 자율성이나 독립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이 누려야 할, 누릴 수 있는 공적 가능성의 문제가 된다. 역량접근법에 의할 때 존엄은 선언에 머무르거나 개인주의적 권리 틀에 갇히지 않고 사회적 돌봄과 정치적 실천 속에서 사유된다.
돌봄의 가치 재구성해야
돌봄을 인권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돌봄의 가치를 재구성해야 한다. 흔히 돌봄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육아·간병·가사 같은 돌봄노동이나 아동, 장애인, 노년 등의 문제를 먼저 떠올린다. 돌봄노동에 대해서는 생산적 가치가 없는 일이거나 여성이 하는 일이라는 식의 저평가가 뒤따르고, 돌봄을 받아야 할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는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지 못한다는 이유로 낙인이 새겨진다.
하지만 저자들은 돌봄을 "인간의 탄생과 죽음, 죽음 이후의 과정까지 관여하는 것", "타자의 필요와 고통의 호소에 반응을 보이는 것, 그런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를 지속시키고 재생산하기 위해 인간이 행하는 모든 활동"으로 정의한다.
이는 돌봄을 단지 재생산노동을 넘어 '취약한 인간의 필요에 응답하는, 모든 인간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실천이자 가치'라고 보는 학자들의 공유된 관점과 같다(김희강, '돌봄과 돌봄 없는 정치이론', <한국정치학회보 52집> 2호, 204쪽). 즉 돌봄을 한정된 당사자나 집단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보편적 문제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돌봄은 인간의 의존성을 다르게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자립'과 '의존'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켜 장애인처럼 '자립'하지 못하는 의존적인 존재를 차별하고 혐오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서로에게 연결되고 있고 의존한다. 관계적 존재론에 근거한 돌봄 윤리와 만날 때, 인권은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의존성이 그것에 대한 상호책임으로 해석되고 지지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된다. 그리고 적극적인 인권의 실현은 모욕하고 멸시하고 착취하는 관계에서 벗어나 "더 나은 의존관계를 만드는 것"이 된다.
취약성 또한 제거해야 할 부정적 속성이 아닌 인간의 보편적 조건으로 이해된다. 나아가 우리는 타인의 취약성에 눈뜸으로써 윤리적 존재가 되어 "서로 의존할 만한, 믿을 만한 돌봄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또한 권력의 구조적 차이와 사회제도의 취약성 때문에 발생하는 취약성에 "적극적으로 책임 있게 응답하는 국가"를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취약함은 자립 혹은 독립과 대립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제공하는 적절한 돌봄에 편안하고 안전하게 잘 달려 있을 수 있는 삶"이 독립의 삶이다.
이렇게 인간의 보편적인 상호의존성과 취약성에 근거한 '돌보는 사회'는 "돌봄 자원이 풍부하고, 이 자원이 평등하고 정의롭게 분배되고 순환되는 사회"다. 돌보는 사회에서 돌봄 책임은 "개인의 인성과 결부된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시민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동으로 책임지는 시민적 덕성의 문제"이며 그렇기에 "정치적 문제"이다.
그리고 돌봄의 수혜와 제공을 평등하게, 즉 정의롭게 분배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토대이고 핵심이다. 인간과 사회, 정치공동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가치인 돌봄의 가치를 중심으로 재편된 민주주의를 돌봄민주주의라 한다(김희강, '돌봄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넘어', <한국여성학> 제36권 1호).
돌봄과 인권의 만남에서 핵심은 '보편성'에 있다
돌보는 사회, 돌봄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돌봄에 결부된 '민폐'라는 낙인을 떼어내야 한다. 이는 "노동/일과 가치를 둘러싼 개념의 항쟁, 전환"이 요구되는 문제다. 돌보는 마음이 "사적 개인 돌봄자-보호자의 결단을 넘어 모든 시민들이 함께 키우고 가꾸는 역량"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돌봄 수행자로 가족, 그중에서서도 (여성) 배우자 또는 자녀가 지목되는 부정의, 돌봄의 자격을 따지고 배제하는 부정의, 돌봄수혜자와 돌봄제공자가 고착화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겪는 부정의가 해소되어야 한다. 즉 돌봄의 탈가족화, 탈여성화, 탈시장화가 필요하다.
돌봄과 인권의 만남에서 핵심은 '보편성'에 있다. '아무나' 돌봄 받을 수 있고 '아무나가 아무나를 돌볼 수 있다'는 돌봄에 대한 권리의 보편성은 국가 책임만으로 달성되지 않는다. '아무나 돌봐라'가 가리키는 보편성은 "타자의 헐벗고 취약한 얼굴에 책임으로 응답함으로써 비로서 주체가 되는 사람들 간의 윤리적 관계의 보편성"이다.
저자들은 나가는 글에서 돌봄으로 이루어진 삶이 넉넉하고 즐거울 것이라는 상상이 욕망을 결집하고, 욕망은 돌봄권이 자연스러운 사회의 도래를 앞당길 것이라며, "덜 일하고 더 돌보는 삶으로의 전환"을 위한 본격적인 상상과 욕망을 주문한다.
늘 노력하고 경쟁하지만 현재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고통 받는 삶이 아닌, 돌봄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향한 전환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거기에 비인간 존재들까지 포괄하는 공존을 위한 돌봄으로 상상력을 넓힌다면 끊어진 인간과 지구의 관계를 복원할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